기자명 이경수 기자 (nwjns@skkuw.com)

지금까지도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억이 있다. 스무 살 무렵에 나는 밖에서 사람들과 옷깃을 스치며 걷는 것조차 힘들던 시기를 겪었다. 그런 시기의 나를, 나와 네 살 터울인 언니는 그림 재료를 사러 화방을 가는데 함께 가자며 안국동으로 데려갔다. 언니는 우울감이 나아지는 방법을 나보다 먼저 알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나를 이불 밖으로, 집 밖으로 끌어내줬다.

처음 가본 안국동에서 나는 화방도 처음 가보게 됐다. 어릴 때 언니가 미술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이면, 연필의 흑심 냄새, 먹 냄새 같은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그 냄새가 좋았다. 그런데 화방은 종이와 먹, 그리고 물감의 기운으로 가득해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시원하게 기분이 좋았다. 화방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도 정다웠다. 그 분들은 구매를 마치고 나오려는 나와 언니에게 사탕을 건넸다. 아니다. 언니가 계산대에 놓인 사탕을 찾아서 내게 건넸던가. 기억이 흐릿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하루가 내 기억에서 사년 째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나는 하루가 끝나가는 게 아쉽고, 한편으로는 무사히 끝났다는 게 기뻐서 자꾸만 울컥했다. 바깥 풍경을 보려고 버스 창문을 손바닥으로 닦아도 다시 김이 서리는 우중충한 날이었다. 그런데 날씨와는 별개로 그 하루는 내가 살아온 날들 중 가장 따뜻하게 남았다.

지금 내겐 한 학기가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신문사에서 쌓아온 짧은 기억들이 있다. 어색해도 말을 붙여주는 동료들이 곁에 있다. 그들의 너그러운 눈빛이 있기에 아직 너무나도 어색한 부서회의와 기획회의에 용기 내 참여해볼 수 있다. 몇 번을 수정한 문건이 여전히 기사의 태가 나지 않아도 주저앉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부족한 내 기사라도 진심으로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주변 곳곳에 있다. 그들이 물어봐주기에, 나는 제대로 된 기사 하나 없는 채로도 앞으로 이런 글들을 써볼 거라고 자랑스레 답할 수 있다. 지면은 아니더라도 화면에 할애된 이 공간을 빌려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허공에 다짐해본다. 나는 곧 어떤 기자가 되려고 한다고.

사람과 기억이 있어 나는 행복의 꼭대기와 우울의 바닥 사이를 오가면서도 오롯이 살 수 있다. 현재 나는 학교 신문사에 있고, 이곳에서 여러 날을 쌓아 곧 어떤 기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