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내가 유학생으로서 1999년 처음 도착한 베를린에서 서울은 보이지 않았다. 멀어서 보이지 않았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서울을 들어본 사람들은 있었지만,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면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길에서 누군가 다가와 일본사람인지 중국사람인지 물어보는 경우는 있었지만, 한국인인지 물어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독일에 유학 온 어떤 한국인 학생이 박사논문 주제를 결정할 때 실제 일어났던 일이다. 학생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와 관련된 논문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외국인이 그렇게 어려운 주제를 선택하는 것을 보고 지도교수는 걱정이 돼 조언했다고 한다. “굳이 그런 주제가 아니라도 너희 나라와 관련된 주제도 괜찮지 않을까? 동남아시아에도 재미있는 정치사회현상이 있을텐데.” 재미있게 들리는가? 그러나 그 이야기를 직접 들었던 당사자는 내게 이야기를 전하면서 씁쓸해했다. 한국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몰랐다는 이야기니 말이다. 

탓할 것은 없다. 오랫동안 한국은 독재나 경제위기 외에 유럽에서 크게 관심을 가질 것이 없는 나라였다. 딱히 경제정치사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용무가 없다면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큰 관심이 없다. 당장 길에서 우크라이나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본다면 몇 사람이나 정확히 답을 할까?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침공이 있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몇 사람이나 알고 있을까?

지금 머무는 베를린 고등연구원에서 어제 저녁 만찬이 열렸다. 그때 앞에 앉아 있던 프라이부르크대 교수가 내게 물었다. “너희 나라 사람들은 한국이 요즘 이렇게 유명한 것을 아니?” “Of course!” 심지어 온갖 국뽕 유튜브의 존재도 알고 있다. 

외국인들은 한국의 무엇을 높이 살까? 물론 K자가 붙는 온갖 문화예술과 음식문화에도 큰 관심을 보인다. 이제 베를린에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 음식점이 많다. 물론 맛과 모양도 “도대체 이 사람들은 한국에서 뭘 먹어본거야?”하는 말을 하게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하튼 이제 베를린에서 서울은 뚜렷이 보이는 도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잘 모르는 중요한 한류가 있다. 그것은 한국의 민주주의다. 눈부신 경제성장에 덧붙여 한국이 이뤄낸 민주주의는 세계 민주주의사에 기록이 될 만큼 대단한 것이다. 쉽지도 않았다. 일제에서 해방 이후 권위주의와 독재의 역사는 길었다. 그만큼 희생도 컸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4.19나 87년 6월 항쟁은 두드러진 사건일 뿐이다. 그 안에서 정치적으로 매우 역동적인 시민사회가 탄생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성장했다. 모든 것이 다 좋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다 좋은 민주주의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모든 사회에는 문제가 있기 마련이고 한국의 민주주의도 그렇다. 그런 문제점을 감안하더라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20세기와 21세기 세계사에 기록될만한 사건이다. 

한류의 성장도 민주주의가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데나 갖다 붙인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언론과 출판과 문화와 예술의 자유가 제한되는 나라에서, 사람들이 생각을 나누기 두려워하는 나라에서 재능과 창의성이 꽃필 수는 없다. 세계를 돌아보면 정치사회적으로 권위주의적 문화가 횡행하는 곳에서는 문화예술이 흔히 주저앉는다. 나치 정권이 들어서고 음악, 문학, 예술이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선전하는 도구로 변하면서, 뜻있고 능력있는 무수한 예술인들이 독일을 떠나면서 20세기 학문과 문화의 중심이던 독일이 급속히 힘을 잃었다. 아무리 국가가 돈을 쏟아붓고 학교를 만들어도 경직된 사고가 강요되는 곳에서 문화와 예술이 성장하기를 바라기는 어렵다.

한국이 발전시켜 온 민주주의는 비록 지난 역사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아주 아주 커다란 것이다. 전 세계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런 민주주의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노력과 용기, 의지다. 2024년 3월 서울은 베를린에서 또렷이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만든 것은 문화와 음식뿐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있다. 

정치외교학과 윤비 교수. 
정치외교학과 윤비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