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정예본 기자 (nobey@skkuw.com)

당신은 당신의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죽어가는 당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맨정신으로 눈과 혀를 뽑아 신에게 바칠 수 있는가? 질문에 답하기를 망설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기꺼이 희생하겠노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서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개념들은 희미해진다. 사람들은 이것이 가족애의 힘이라고들 한다.

2019년 출시된 공포 게임 <환원(還願): Devotion>에서는 80년대 대만의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유명 극작가인 두펑위, 가수이자 여배우인 궁리팡, 아역 스타를 꿈꾸는 어린 딸 두메이신까지. 이들은 단란한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가장인 두펑위의 각본이 연이어 실패하며 가정에 위기가 찾아온다. 자존심 강한 성격의 두펑위는 자신의 각본이 6번씩이나 거절당했음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실패한 각본에 대한 그의 집착은 점차 딸 두메이신에게로 옮겨가게 된다. 두펑위는 등교를 막고 노래 대회에 참가시킬 정도로 딸에게 큰 기대를 품었고, 두메이신은 부담감과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에 공포감을 느껴 끝내 정신장애까지 겪는다. 그녀는 아버지가 ‘꽃과 사랑’이라는 동화를 읽어주던 기억을 떠올리고 색종이로 튤립을 접으며 스스로 병을 회복해 갔으나, 당시 ‘자고관음’이라는 사이비 종교를 접한 두펑위는 이를 종교의식의 효험으로 착각해 종교에 깊게 빠져버린다.

자신의 영적 세계로 들어간 두펑위는 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눈과 혀, 피를 뽑아 자고관음에게 바친다. 그는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딸을 향한 두펑위의 극진한 사랑이 과연 두펑위 자신과 분리됐는가의 여부다. 작중 두펑위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의 사랑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기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두메이신의 병을 얼른 낫게 한 뒤 그녀를 아역 스타로 성공시켜 자신의 체면을 살리고자 했다. 결국 자기중심적인 사고 안에서 그의 딸 두메이신은 두펑위의 소유이며, 명예를 대신 가져다주는 수단이었다. 그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그 자신과 분리되지 않은 사랑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서 가장 가깝게 묶이곤 한다. 그 결속력은 몹시 강해서 타인을 완벽한 타인으로 볼 수 없게 한다. 서로가 너무도 가깝기에 우리는 가족을 조건 없이 감싸안아 사랑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가까움이 지나쳐 자신과의 동일시로 이어졌을 때 발생한다.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타인과 나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타인을 자신의 세계로 귀속시키며, 끝내는 소유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나친 가까움은 오히려 불행의 단초가 될 수 있다. 그를 보여주듯 두펑위 가족의 이야기는 점차 비극적인 결말로 향해간다. 게임의 결말부에서 두펑위는 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기괴한 민간요법을 행했다가 결국 두메이신을 죽음으로 몰아버리고 만다. 정작 한때 딸의 병을 호전시킨 것은 그저 자신과 두메이신이 함께하던 시간이었음을 알지 못한 채, 현실을 마주한 두펑위는 미쳐버린다.

프랑스의 한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타자성’을 무시하고 타자를 자신의 세계로 환원(還元)하는 태도를 일찍이 비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타자를 스스로와 분리하고 존중함으로써 비로소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다. 결국 타인이자 타인이 될 수 없는 가족에게도 일정한 거리는 있어야 한다. 나와 가족은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차이점을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멀어져야만 비로소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정예본 부편집장
정예본 부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