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순(프랑스어문학과) 교수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이번 학기에 난 굳이 수업시간에 출석을 부를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두개 수업 모두 학생들이 거의 빠짐없이 출석하고 있음을 꽉 채워진 좌석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질문인 줄 알면서 난 엊그제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왜 너희들은 결석도 하지 않느냐?”고. 한 학생이 금방 대답했다. “요즈음 등록금이 너무 비싸서요.” 그러자 또 한 학생이 나를 의식하며 답하였다. “교수님 강의가 재미있어서요.” 다행이다. 그들이라고 지루함, 고민, 슬픔 같은 것들이 없을 리 없지만 모두의 얼굴에 활기와 성실함과 의지가 담겨있었다. 그러나 예전의 학생들과는 달리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뒤쳐지지 않게 살아야하는 오늘의 젊은이의 모습도 배어있었다.     

7,8년 전쯤 지각과 결석을 반복하던 어떤 학생이 귀엽게 내게 변명했었다. “교수님, 프랑스 철학자들은 게으름뱅이가 많지요? 데카르트도 게으름뱅이였다면서요?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며 생각하기를 즐겼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저도 게으름을 피우고 있어요.” “그래? 그렇다면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괜찮겠구나. 그런데 그것이 육체의 게으름으로 머물지 말고 정신의 여유이며 한가로움이기를 바란다. 루소는 이렇게 말했지. ‘걷지 않으면 생각도 멈추고, 육체를 움직여야 정신이 움직인다.’고.  침대에 머물러 생각하는 대신 산책을 하며 정신을 움직여보는 건 어떨까?”

바야흐로 가을이다. 가을은 루소가 즐겼던 몽상과 산책에 좋은 계절이기도 하다. 컴퓨터 앞에서 쌓아야 할 지식들과 씨름하다가 지칠 때 잠시 산책하며 여유를 찾아볼 것을 권하고 싶다.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그 시간은 굴레로 작용한다. 그러나 미로와 같이 곡선, 모호함, 복잡함을 지닌 사회에서 요구하는 창의성과 지혜로움은 오히려 시간의 여유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자크 아탈리라는 한 프랑스 정치인이 쓴 『미로 - 지혜에 이르는 길』이라는 책을 떠올린다.

그는 지혜에 이르는 길을 꼬불꼬불한 미로를 통과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미로는 도달해야 할 목표의 위치, 선택의 어려움, 출구와 입구의 다양함, 막다른 통로의 존재 여부 등에 따라 단순할 수도 있고 복잡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듭되는 망설임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끈기 있게 밀고 나가면 시간을 잃지 않고, 행동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면 시간을 벌 수 있는 곳이 미로의 세계이다. 미래의 성공은 항해하고 도전하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능력에 좌우된다고 그는 말한다. 실패에서 가치를 찾아낼 줄 알아야 하며 막다른 골목이나 불가능한 것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에서 방황하는 일이 없다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예술에서는 길을 잃는다는 것이 창조의 조건이다. 학습에 있어서는 실패가 없다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미셀 푸코가 ‘미로는 길을 잃는 장소가 아니라 항상 길을 잃고 나오는 장소다.’라고 적고 있음도 같은 의미에서일 것이다. 

얼마 전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알퐁스 도데의 단편 『스갱씨의 염소』를 읽은 후 현실보다는 이상을, 편안함보다는 불확실한 미래를 택한 대가로 죽음을 맞이한 염소를 오히려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들의 꿈과 용기를 높이 사고 싶다. 더불어 이 가을이 학생들 모두에게 지혜로운 계절이 되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