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고민하는 페미니스트, '일다' 조이여울 편집장

기자명 배연진 기자 (darkbae@skku.edu)

박재은 기자 modernna@skku.edu
부슬거리는 가을비가 내리던 지난 금요일. 서울시 종로구의 간판도 없는 한 허름한 사무실 안에는 두 세 명의 기자들이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바로 지난 2003년 창간된 여성주의 사이버 저널 '일다(www.ildaro.com)'의 모습이었다. 이곳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여성들의 인권향상을 위해 자신의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 조이여울(32) 편집장을 만날 수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우리 학우들을 위해 흔쾌히 시간을 내준 그녀를 만나 페미니즘이라는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고 보냈던 그녀의 과거와 현재의 활동에 대해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프로필
1974년 출생
1994년 이화여자대학교 컴퓨터학과 입학
2000년 여성신문 입사
2003년 여성주의 저널 일다 창간
현재 여성주의 저널 일다 편집장
대표 글 : '여성정치, 이미지만 있다' 외 다수

■ 처음 여성주의에 눈뜨게 된 계기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일상에 있어 여성들에게 '하지 말아야한다'는 규제가 심했다. 심지어 학교에서는 남학생만이 대표를 할 수 있다는 조항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워낙에 불공평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음에도 불합리하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어렸고 나 혼자만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줄 알았다.

내가 고등학생 때 정신대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화 된 적이 있다.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생활을 한 그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울분이 치솟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그러나 그들이 한평생 정신대 문제를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우리사회의 순결 이데올로기에 대해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을 머릿속에 꽁꽁 싸메어 둘 뿐이었다. 나는 그저 아무 힘없는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

나의 여성주의에 대한 인식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크게 아뀌었다. 그동안 유별난 나 혼자만의 고민이라 생각했던 일들이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도서관에는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한 사람들의 서적으로 가득했고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그것들을 접했다. 또 이를 통해 뭔가 활동으로 나의 생각과 고민들을 풀어나갈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 대학생 시절 여성주의 활동을 한 적이 있는지
이화여대 학내여성자치조직인 '여성위원회'의 2대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온라인 성폭력 사건' 등 여러 사안들이 많았는데 여대라서 그런지 꽤 많은 학우들의 호응이 있었다. 또 매 학기 초 '페미니즘 문화제'를 열어 신입생들이 여성주의에 대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지금은 폐지된 '금혼학칙'이나 정신대 문제와 관련한 여러 토론회와 집회 등을 열기도 했다.

요즘 대학생들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당시 매년 이대의 대동제 때 마다 고대생들이 떼로 몰려와 행패를 부리던 일이 있었다. 이는 단순 장난의 차원을 넘어 여러 기물이 부서지고 일부 여학우들이 부상을 입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것은 명백한 집단폭력이자 여성공간에 대한 성적 침해였다. 따라서 우리는 고대 여학생위원회와 함께 이를 폐지하자는 대자보도 붙이고 대동제 때 고대생들의 폭력적인 모습을 비디오에 담아 국내·외 언론사에 알렸다. 이것은 '고대생 집단난동 사건' 이라며 큰 이슈가 됐고 고대에서는 초기에 대자보가 찢기는 등 반발이 거세기도 했지만 1998년 이후부터 이런 악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이 외에도 여성영상집단 '할미꽃'의 멤버로도 활동했다. 이 모임은 대학 마지막 학기에 네 사람이 모여 결성한 모임이다. 정기적인 활동보다는 임시적으로 틈날 때마다 모여 타큐영상을 만들었으며 그 주제는 여성실업이나 여성노동운동사, 아프가니스탄여성연합 등에 관한 것이었다.

■ 현재 직업이 '기자'인데
대학생 시절 그동안의 활동을 묶어 '3차 성징'이란 잡지를 발행한 적이 있다. 잡지 서두에 '여성주의 매체의 필요성'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후에 친구가 그 글을 보여주면서 기자란 직업에 도전해 보지 않겠냐고 권유했다. 처음부터 기자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때 당시 여성신문 이외에는 여성의 권리를 대변해 주는 아무런 매체가 없었고 일간지에서도 여성관련 이슈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여성신문의 공채시험을 통해 '기자'의 길을 걷게 됐다.

■ 기사를 쓸 때 항상 염두에 두는 점이 있다면
많은 기자들은 기사를 쓸 때 '이 기사가 공정한가', '객관적인 사실인가'를 고민한다. 그리고 나 또한 기사는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공정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매체에서나 관점이 있듯 우리는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기사를 쓰며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공정성이다. 최근에 '진보'를 표방한 무수한 매체들이 생겨나고 있는데 각 매체들이 추구하는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은 많이 부족해 보인다. '여성' 이란 소재를 다룬다고 전부 여성주의 매체인 것은 아니다.'일다'의 독자들도 종종 "부디 처음의 소신을 잃지 말아 달라"는 당부를 하곤 한다.

■ 신문사 생활을 짧게 마쳤는데
여성신문에서 2년 반 정도 활동을 했는데 많은 한계와 제약을 느꼈다. 재정문제와 더불어 윗사람들과의 소통도 원활하지 못했고 각각의 다른 목적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보니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신문사를 그만두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이계경 전 여성신문 사장의 한나라당 입당이다. 저마다 다른 색을 지니고 있는 회원들에게 있어 단체의 장이 하나의 정당에 입당하는 것은 매우 큰 악영향을 미친다. 나도 이 때문에 큰 실망을 느꼈고 여성신문을 나와 여성주의 저널 '일다'를 만들게 됐다. 하지만 여성신문에서의 경험은 언론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

■  '일다'의 여러 기획 중 특히 아끼는 코너가 있다면
여러 기획들이 있지만 독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코너는 매력적인 여성들을 찾아가는 '인터뷰'다. 타 매체에서는 보통 인터뷰라고 하면 유명하거나 인지도가 높은 사람 또는 상을 받은 사람이나 단체의 장들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특색과 숨을 매력을 보여주는 기사를 쓴다, 이것은 위를 쳐다보는 여성주의가 아닌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여성주의로 독자들에게 마치 자신의 이야기와 같다는 느낌을 주어 좋은 반응을 얻는 것 같다.

■  한 마디로 '일다'를 표현한다면
'모래위에 쌍은 성'이라 표현하고 싶다. 일부에서는 독자수도 꾸준히 늘고 있고 인지도도 꽤 얻어 성공한 케이스라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시스템적으로 많은 허술함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일다'는 상근기자도 2명에 불과하고 재정수입이 거의 없어 후원에 의존할 뿐이다. 무보수이기에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원 활동으로 글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편집장의 입장에서 이런 부분을 보안하고 싶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 '페미니스트 에세이'라는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중인데
처음에는 한 포털사이트의 계정을 빌려 남들처럼 개인 친분을 목적으로 만든 홈페이지였다. 그런데 페미니즘 활동을 하다 보니 어느덧 지인들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이 방문하고 있었다. 그때 주변사람들의 권유로 공적인 느낌이 강한 홈페이지로 이전을 하게 됐고 내가 쓴 기사들과 영화평 등을 싣게 됐다. 이것이 지금의 홈페이지(www.yeoul.pe.kr)다

■ 여성주의에 무관심한 학생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현재 많은 대학생들은 취업난으로 인해 경제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대학생들은 특혜를 지닌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들은 대학생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외도'가 허용되는 시기다. 나중에 직장을 얻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다른 고민들을 할 여유가 없어질 것이다. 실제 자신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기도 하는 기존의 통념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페미니즘은 이런 작은 고민하나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깨달은 불합리한 것들에의 문제제기에 있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여러분들이 지난 중, 고등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인권과 평등에 대한 고민을 통해 자신의 올바른 가치관을 찾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