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최근 대학 졸업생의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맞춤형 교육이 대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 맞춤형 교육은 주로 ‘기업이 원하는 인재’에 맞추어 교육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여러 대학에서는 특정 기업의 ‘사원 교육’을 시키겠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기업은 사원 교육을 시키는 비용을 절감해서 좋고, 대학은 졸업생의 취업률을 높여서 우수 학생을 확보할 수 있어서 좋고, 학생은 그 어려운 취업이 보장되어서 좋을 것이다.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그렇다면 이 맞춤형 교육의 의미는 무엇이고, 왜 지금이 이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하여 먼저  교육이 무엇인가를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육은 사회의 측면에서 보면 사회에서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며, 개인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 행복을 확대하기 위해 능력을 배양시켜주는 것이다. 여기서 교육은 사회와 개인의 필요나 요구에 맞는 인재의 양성이자 능력의 배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육은 본질적으로 ‘맞춤형 교육’이다. 그러므로 서구 중세의 신학교에서는 성직자를 위한 맞춤형 교육을 시켰고, 조선시대의 성균관에서는 지도자를 위한 ‘맞춤형 교육’을 시켰다.

최근의 교육에서 이러한 본질적 성격을 상실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적인 시장의 경쟁 법칙에서 연유하는 빠른 사회적인 변화를 따라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분화되고 정교화된 사회적 요구를 기존의 대학 제도가 맞추어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동어반복(同語反覆)인 ‘맞춤형 교육’이 부각되고 있다. 따라서 주로 기업의 요구에 부합하겠다는 ‘맞춤형 교육’은 교육의 본질을 회복한다는 매우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맞춤형 교육이 기업의 욕구에 맞추는 것만으로 한정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회가 기업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며, 대학은 기업의 종업원만을 길러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회에서는 학자도 필요하며, 대학에서는 학자도 길어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 대학에서 어느 ‘천재 소년’을 위한 ‘맞춤형 교육’을 시키겠다는 의욕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이 교육이 개인들의 기능적인 능력 향상에만 맞추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육은 사람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므로, 물건의 변화를 추구하는 상품의 생산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물건이 인간의 수단인 것과는 달리, 인간은 그 수단을 향유하는 주체이다. 기업의 종업원과 학자는 종업원이고 학자이기 이전에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맞춤형 교육’에서는 물건을 만드는 법만 가르쳐서는 안 되고, 놀고 즐기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법도 가르쳐야 한다. 공학만이 아니라 인문학도 가르쳐야 한다.

기업의 요구에 맞추려는 대학 교육은 교육의 본질에 근접한다는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교육이 기업의 요구에만 한정되어서는 안 되고, 학자의 양성과 같은 더 많은 사회적 요구에도 부응하여야 한다. 그리고 전인 교육을 지향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