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부산 비엔날레를 찾아

기자명 강수련 기자 (imsorry86@skku.edu)

지금도 부산에서는 비엔날레의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 다음 달 25일까지 계속되는 이 미술축제는 우리의 일상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이 곧 현대미술임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미술을 우리의 일상 중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이에 본지는 ‘숭고와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으로 대표되는 현대미학을 토대로 현대미술전을 되돌아봤다. 이를 통해 아직은 낯설기만한 현대미학과 현대미술에 한 발짝 다가서고자 한다.

“이런 것도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거요?”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현대미술전을 돌아보던 노인이 안내원에게 던진 질문이다. 생각보다 한산했던 전시관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현대미술전을 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봤지만 선뜻 이야기 할 수 없었던 그 물음이었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우리가 현대예술의 숨은 의미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난해한 현대미술작품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찾아내기 보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 작품을 정리하고 뒤돌아서기 일쑤다.

이에 반해 철학자 아도르노는 예술은 눈에 보이는 메시지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는 현대예술의 이상을 “사물을 통해서, 사물의 손상되고 소외된 형태를 통해서 말을 하는 것”이라고 봤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추상회화는 그 형태를 통해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고 손상된 사회의 부정적 상태를 고발하며, 시는 무의미의 연관관계로써 사회에 아무 의미도 존재하지 않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미술전 CAFE1에서 전시중인 거대한 물고기를 보면 그의 관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본의 2인조 작가그룹, 요도가와 테크닉의 작품인 이 물고기는 일단 천장에 닿을 듯한 거대한 크기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두 작가는 이 작품을 직접 낙동강 하구에서 야영을 하면서 낙동강을 따라 떠내려 온 부유물과 쓰레기를 이용해 만들었다. 그들은 이 작품의 형태, 그 자체를 통해 환경오염으로 얼룩진 현대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다음으로 시선을 끈 것은 샘 듀랜트의 작품이었다. 겉보기에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의자를 그냥 여러 개 배치해 놓은 모습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평범한 플라스틱 의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출품작은 기존의 플라스틱 의자를 도자기로 복제해 만든 것이다. 이 복제품은 어떤 틀도 없이 중국의 도공들이 완전히 수공으로 제작한 것이기에 ‘근본’이 되는 플라스틱 의자보다 더 큰 값어치를 지닌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오리지널의 가치와 복제품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이는 곧 현대미학을 이야기 할 때 빠질 수 없는 개념인 ‘숭고와 시뮬라크르’ 이야기로 귀결된다. 현대미학에서 ‘숭고’란 개념은 ‘근원’이란 개념과 상통한다. 반면 시뮬라크르는 ‘복제’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벤야민의 경우, 복제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복제가 원작의 권위를 위협할 수도 있음을 이야기 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영화예술이다. 동시 상영되는 영화예술에는 아예 원작이 없다. 그는 이를 두고 “예술작품의 복제가능성이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수용방식을 변화시켰고 그들에게 비평가의 태도를 갖게 했다”고 말한다. 현대미술에 대해선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선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것을 보면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감상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자연스러운 느낌이라고들 말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현대미술작품을 볼 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것은 그 어떤 전문가보다 작품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현대미술작품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느꼈기에 우리의 마음 한 켠이 저절로 불편해졌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