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C 책과 20C 사람들, 21C 부산에서 만나다

기자명 김승영 기자 (xiahandme@skku.edu)

매일 급변하는 사회 속도에 발걸음을 맞춰야 하는 현대. 트렌드가 존재하는 책 시장에서도 편리와 빠름을 쫓는 현대의 흐름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60~80년대 고학생들에게 큰 힘이 됐던 헌 책방 골목들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서울의 청계천, 대구의 동인동 등 내로라하는 대규모 책방 골목들은 재개발과 생계를 위협하는 수입으로 인해 2000년 대 들어 속속 없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꿋꿋이 책방 골목으로서의 자리를 지켜내는 곳이 있으니, 바로 부산의 문화 거리인 보수동 책방 골목이다.

보수동 책방 골목엔 베스트셀러가 없다. 대형 서점에서 왕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는 베스트셀러는 현대 출판 시장이 갖는 자본 경쟁 동력의 핵인 것이 사실. 그러나 헌 책들이 오가고 희귀한 가치의 고서적들이 즐비한 보수동 책방 골목에선 대량 규모의 ‘인기도서’를 만나기 힘들다. 하기야, 도시의 대형 서점들과 똑같은 책들로 자본의 흐름에 온 몸을 맡기는 경영 방식에 편승했다면 어떻게 지금껏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베스트셀러를 찾기 힘들다는 서점으로서의 절대적인 맹점은 60여 년 역사 보수동 책방 골목 특유의 여유로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사실 편한 것으로 따지면 보수동 책방 골목은 대형 서점들에게 완전히 패할 수밖에 없다. 대형 서점에선 수만, 수억 권의 책들이 컴퓨터 전산망으로 일괄 처리 돼 1분 안에 원하는 책을 찾을 수 있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스마일 맨들의 친절한 서비스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보수동 책방 골목에선 손님이 직접 바닥부터 천장까지 켜켜이 쌓여있는 책들 속으로 파묻혀야 한다. 목도 아프고 눈도 빡빡하다고 투덜대자 “잘 좀 찾아봐!”라는 서점 할아버지의 호통 섞인 무심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다 이쪽으로 들려오는 느릿한 팔자걸음 소리. 한 달에 한두 번 책방 골목에 오기를 25년 동안 해온 보수동 단골 김민생(48)씨는 “광화문으로 나가서 편히 살 수도 있지만 굳이 여기를 찾는 데는 이유가 있다”며 “쌓여 있는 책들 옆에 붙어서 이 책 저 책 읽다 보면 진귀한 보물들을 간혹 발견하게 된다”고 보수동 책방 골목의 도서 디스플레이 시스템이 갖는 매력을 찬양했다.

그러나 생계로 서점을 경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수입이 6,70년대 같지 않은 현재로선 자본의 위기를 타계할 나름의 방안을 모색하는 게 중요한 임무기도 하다. 2005년 이래로 시작된 보수동 책방 골목축제 역시 이러한 방안의 일환. △고서 전시회 △헌 책 기증회 등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돼온 이 축제는 올해 역시 개최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보수동 책방골목 번영회 총무이자 고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양수성(35)씨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이야 급하죠. 그래도 몇 십 층짜리 건물 짓고 그 안에서 금고 버튼 눌러가며 책 장사할 생각은 없어요. 여기가 책들만 오가는 곳은 아니잖아요”

울퉁불퉁 좁다란 골목길을 나오는 길. 세대를 뛰어 넘어 전 주인과 새 주인 간의 교감이 느껴지는 보수동 책방 골목에선 오늘도 60여 년을 이어온 책들의 묵은 호흡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