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선영 기자 (sun3771@skku.edu)

대중교통은 아침마다 북적이는 사람들로 짜증나는 공간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서 인생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만들어왔다. 대중교통의 대표주자 중에서도 지하철 1호선에 담긴 인간군상의 모습, 버스 기사아저씨의 모습,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기차의 뒤편에서 사라지고 있는 간이역을 바라봄으로써 대중교통 속 숨어있던 보석을 발견해보자.

졸린 눈을 비비며 을씨년스러운 새벽길에 나선다. 배차표를 받아들고 기름 냄새 진동하는 버스에 올라 점검을 한다. 새벽 4시, 싸늘한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면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는 것이다 - 『버스 오디세이』中 기름밥의 한

새벽녘, 실제 첫차의 풍경은 어떠한가
고요한 도로 위를 달리다 보면 재래시장에 장사하러 가는 어르신들을 매일 정류장에서 만날 수 있다.??이번 정류장에서는 이 손님이 타실텐데?? 기대도 되고, 혹시 안 계신 날엔 건강이 걱정되기도 된다. 첫 단추를 잘 꿰야 즐겁다는 생각으로 첫차 손님들에게 말도 많이 걸고 안부도 물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사람들은 버스 일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지만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어떻게 하면 손님들을 즐겁게 맞이하고 안전하게 모셔다 드릴 수 있을까 생각하면 힘들 일이 없다.

처음 버스운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2살 때 아버지와 피난 온 뒤 생활이 어려워 노동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공무원보다 버스 수입이 좀 더 좋았고, 어릴 때는 서울 가는 길을 달리는 버스가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내가 그 버스를 운전하고 있으니 참 신기할 따름이다(웃음).
당시 버스의 모습은 지금과 얼마나 다른가

말도 못했다. 타 회사와 경쟁하기 위해 안전 교육도 없이 기사들을 도로로 내보내 난폭운전이 비일비재했고 손님들은 거의 짐짝처럼 취급됐다. 만원일 때는 급히 핸들을 꺾어 승객들을 차 안쪽으로 쏠리게 하고 그 틈에 안내양이 문을 닫는 기술이 있을 정도였다. 히터도 없어 운전기사들은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 바닥에 가마니를 깐 채로 브레이크를 밟아야 했고, 여름에는 본네트의 열 때문에 물수건을 준비해놓고 다리에 한 번씩 칠해줘야 할 정도였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 운전사들의 인격도 많이 존중해주고, 좋은 근무환경과 복지시설을 제공해줘 더 신바람 나게 근무할 수 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
시골에서 오신 한 할머니가 아들 집을 못 찾으셔서 봉천동 달동네까지 함께 택시를 타고 간 적이 있다. 꼬박 하루가 걸려 다음날 근무도 못하게 됐지만 아들은 이후에도 몇 번씩이나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또 한 번은 버스 안에서 임산부가 통증을 느껴 급하게 뒤차로 다른 손님들을 모신 뒤 병원 응급실로 간 적이 있다. 그 당시는 전화도 없는 시절이라 출산소식도 남편에게 직접 찾아가 전해줬는데 남편은 기사님 덕분에 아들을 얻었다며 너무 고마워했다. 험악한 인상과 달리 친절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웃음).

버스기사로서 앞으로의 소망이 있다면
나도 원래는 젊은 혈기에 반발심도 있었고, 15년간 근무했던 회사가 파산돼 7천만 원의 돈을 날린 뒤에는 이렇게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독서를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었고 지금도 휴식시간이면 다양한 책을 접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나와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은 권위를 잘 버리지 못한다. 주위 사람들을 위해 나 하나가 바뀌면 빛이 보이는데 그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민을 생각하는 다른 기사분들의 의식도 조금 바뀌었으면 한다.

나는 이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아이 둘은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다. 우리를 먹고 살리는 분들이 시민이라는 의식을 갖고, 건강하다면 정년 70세까지 봉사하며 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