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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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대신문
  • 승인 2008.01.22 18:14
  • 호수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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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가작 - 이은영(국문04)

오늘도 늦잠이다. 창밖으로 지나갔을 사람들의 활기찬 출근소리에도, 야채장수의 시끄러운 확성기 소리에도 불구하고 난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침대에 비비적대고 있었던 것이다. 온 몸에는 식은땀이 났었는지 여름 아침이라고 하기가 이상할 정도로 한기가 들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대강 손으로 만진 채 몸을 일으켜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열 시가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요즘 난 몸이 노곤하면서도 밤에는 잠이 잘 오지 않아 동이 틀 때 쯤 겨우 잠이 들곤 했다. 노곤함과 무기력함, 불면증의 증상을 난 그저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면서 으레 찾아오는 계절병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식구들은 벌써 나간 지 오래인지 거실에는 썰렁한 기운만이 남았다. 현관에 벗어둔 슬리퍼는 아무렇게나 내동댕이 쳐있고, 개수대 안에 그릇들은 질서 없이 쌓여있었다. 시간이 촉박하단 이유로 미처 냉장고에 넣어두지 못하고 싱크대에 덩그러니 놓아둔 반찬들이 아침 시간의 치열했던 흔적이라도 되는 듯 두드러지게 보였다.
‘내가 없는 아침…….’
나는 또 상념에 잠겼다. 요즘따라 마음이 울적해지면서 외로움을 느낄 때가 부쩍 많아졌다. 특히나 남편과 수정이, 수민이가 내 손을 떠나 출근과 등교 준비를 할 수 있었던 시기부터 이런 울적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아니, 그것은 더 이상 내가 해 줄 일이 없다는 데에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일 것이다. 남편은 이제 한창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집보다는 회사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수정이는 대학에 들어간 후 자신이 직접 용돈을 벌어 사용하는 효녀였고, 이번에 대학에 들어간 수민이도 자신이 직접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착실한 아들이었다. 이렇게 사고 한 번 안 치는 착실한 딸, 아들을 보면 한 편으로는 뿌듯하다가도 다른 한 편으로는 내가 더 이상 해 줄 일이 없다고 생각되어 섭섭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어미의 마음일 것이다.     

괜한 상념에서 벗어나야겠단 마음으로 난 여느 때와 같이 홀로 주방에서 점심을 먹을 준비를 했다. 그릇을 식탁으로 옮겼다가 다시 주방으로 가져와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난 홀로 있으면 대개 싱크대 위에 밥과 반찬을 준비하고 주방에 선 채로 끼니를 해결하고는 했다. 데우다 만 김치찌개와 김, 깍두기를 반찬으로 조촐하게 아침 겸 점심을 먹으려던 나는 숟가락을 들려는 찰나 현관에서부터 울리는 벨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누군지?’
잰걸음으로 현관에 나가 비디오폰을 확인해보니 Y가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서 있었다.
“미쳤어? 누가 보면 어쩌려고?”
난 다급한 마음에 비디오폰 송화기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니까 대문 빨리 열어줘.”
아마 오늘 Y는 작정을 하고 우리 집을 방문한 모양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한시라도 빨리 피해야 하기에 난 어쩔 수 없이 현관문을 열어 잽싸게 Y를 집으로 들였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손님인 줄 알겠지, 뭐. 아무렴 어때. 자, 이거나 냉장고에 넣어.”
그러고 보니 Y의 손에는 대형 마트의 하얀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가득 차서 무거워 보이는 비닐봉지 위로 삐죽 튀어나온 연분홍 소시지를 보고선 난 Y가 봉지에 가득하게 장을 봐 왔음을 알아챘다.
“뭘 이렇게 사왔어? 그냥 올 것이지…….”
“그냥. 당신이 좋아하는 반찬이랑 간식 좀 샀어. 밥도 만날 대충 먹는 것 같아서.”
비닐봉지를 열어보니 초코 과자, 당근주스, 메론, 초콜릿, 플레인 요구르트 등 내가 좋아하는 것만 가득 있었다. 이렇게 나를 잘 알고 배려해주는 Y를 생각하면 내심 기쁜 마음이 들었지만, 사온 물건을 냉장고에 채우면서 문득 울컥한 기분이 느껴졌다. 내 기호식품도 모른 채 언제나 자신이 좋아하는 사과와 오렌지주스만을 사오며 으레 나도 좋아할 거라고 판단하는 남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Y는 적어도 나에 대한 관심은 있었다. 신랑도 자식들도 몰라주는 내 자신에 대하여 말이다. 알게된 지는 얼마 안됐지만, Y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알았고,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이야기에 맞장구도 쳐주었고, 내 미래에 대해 함께 고민해주었던 것이다. 항상 생선 머리 쪽을 발라먹는 나를 보면서 희생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이건 당신이 좋아하는 생선대가리잖아’라고 하며 머리를 떼어주기까지 했던 남편의 모습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난 와락 Y의 목을 끌어안으면서 기습적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Y는 늘 나에게 다정다감한 모습이었다. 그는 항상 내 의중을 물었고,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았다. 집에서 잠만 자고 출근하는 남편보다는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Y의 모습을 사랑하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점차 Y와 내 호흡이 빨라지며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자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옷을 하나씩 벗겨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내 팔을 들어 올려 내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겨내었고, 나는 그가 입은 반팔 남방의 난추를 풀고, 그의 벨트를 고정했던 버클을 풀었다. 주방에서 뜨겁게 애무를 나누던 우리는 여전히 입술을 포갠 채 걸음을 옮겨 천천히 침실을 향했다. 둘이 아닌 한 몸인 듯 그렇게 끌어안은 채 서로의 살결을 느끼며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비록 Y에게도 아내가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우리의 정사를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이날 이후 Y는 남편과 아이들이 없는 오전 시간을 틈타 종종 우리집을 방문했다. 회사에서 반강제적으로 퇴직한 후, 신촌에서 와인삼겹살 점포를 차린 Y는 가게를 열기 전인 오전시간에 한가했기 때문이다. Y를 만나게 된 것도 동창들과 그의 점포를 방문했을 때였다. 처음 Y를 봤을 때, 장사의 노하우를 떠나 손님들의 고기를 구워주는 모습이 자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와의 대화중에 나와 같은 동네에 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날 때 장이나 함께 보자고 서로 번호를 교환했을 뿐인데, 서로에 대한 작은 호감에서 시작했던 관계가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동네 사람이란 걸 핑계로 같이 장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사심이 없다 해도 동네에서 만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Y의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거나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근처 모텔을 가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요즘, 일주일에 한 두 번씩 Y가 우리집으로 오니 오히려 괜한 마음을 졸일 필요도 없었고, 허투루 모텔비나 주유비를 쓰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다.
물론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미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2층집으로 이사 온 후로 남편은 서재에서 공부한다는 핑계로 침실 출입을 하지 않으니 이건 각방을 쓰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아이들은 출입할 때 외에는 자신들의 방이 있는 2층에서 도통 내려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난 독수공방 신세였는데, Y를 만난 후로 잃은 줄만 알았던 여자의 기쁨을 되찾은 것이었다.

Y가 우리집을 드나든 지 두 달이 지난 어느 토요일이었다. 열대야 때문인지 난 간밤에도 밤새 뒤척거리다가 오전 무렵 선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남편과 아이들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서 배웅을 하려고 했지만, 그새 또 잠이 들고 말았다. 유난히 소화도 안 되고, 몸이 무거워 점차 무기력해 지던 나는 올 가을이 오기 전에는 반드시 보약 한 재를 지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과연 나를 위해 보약값을 지불할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항상 식구들 것만 먼저 챙기다 보니 어느새 내 자신을 위해 소비하는 것이 어색하고, 심지어 죄책감까지 들었던 것이다. 괜한 상념에서 벗어나려고 TV를 켰다. 케이블 TV에서는 예전에 봤던 영화인 <왓 위민 원트>가 하고 있었는데, 멜 깁슨이 자신의 욕조에서 전기 감전된 후 여자들의 마음을 알게 되는 초능력을 갖게 된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저렇게 여자들의 속마음을 전부 안다면 얼마나 편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볼륨을 최대한 높였다. 영화가 한창 흥미진진해져 멜깁슨이 새로운 프로젝트 때문에 여자를 유혹하는 작면 쯤 왔을 때, 협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나 자기네 집 앞이야. 얼른 문 따줘.”
오전이 훨씬 지난 3시쯤인데, 뜻 밖에도 우리집 앞에 왔다는 Y의 전화였다.
“어머, 당신이 이 시간에 웬 일이야? 문 열어 놓을 테니까 주위 잘 살피고 들어와.”
비디오폰의 버튼을 누르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고, 잠시 후에 그는 재빠른 걸음으로 현관으로 들어왔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외롭게 보낼 토요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황량한 집 안에 그와 단 둘이 있을 생각에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어쩐 일로 토요일에 온 거야?”
“어제 새벽까지 손님 있어서 늦게까지 일했는데, 오전에 자다 일어나보니까 마누라도 나가고 계속 당신이 생각나서 미치겠더라고. 주방장한테 몸이 안 좋아서 늦게 나간다고 하고 점심상 준비하라고 했지, 뭐. 자기는 나 안 보고 싶었어?”
“안 그래도 혼자 주말 보내는 줄 알았는데, 뜻 밖에 당신이 오니까 너무 반갑네.”
우리는 늘 그랬듯이 텅 빈 침실로 들어갔다. Y는 빠른 속도로 자신의 옷을 벗고, 내가 걸치고 있던 원피스를 벗겨내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느 때보다 더욱 격렬하게 서로의 몸을 파고 들어갔다. 남편과 언제 잠자리를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분명 그도 나 아닌 다른 여자를 올라탄 채 짐승같은 호흡을 내뱉을 것이다. 출장 가는 곳마다 한 명씩 고정적으로 만나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침실 안에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불구하고, 온 몸이 온통 땀으로 젖어 내 몸은 더욱 흥분되는 것 같았다.
“자기, 오늘 정말 최고야.”
거친 숨을 내쉬던 Y가 체위를 바꾸려고 몸을 움직이는 틈에 난 그의 자존심을 높여주려는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칭찬이 약이 됐는지 Y는 대답 대신 얼굴에 미소를 띠며 더욱 격정적으로 피스톤 운동을 계속했다. 사실 이렇게 관계 중에 여자가 남자의 자존심을 세우는 말을 해줘야 남자들이 더 좋아한다는 것은 남편과의 잠자리가 원만하지 않은 이후에 알게 된 노하우였다. 신혼 초부터 남편은 잠자리를 마치면 항상 등을 돌리고 자곤 했는데, 그 때까지 난 남편이 등을 돌리며 자는 이유가 남편이 주도하는 잠자리에 내가 너무 소극적으로 대응해서 그런 줄 알았던 것이다. 순진한 새댁에서 능글맞은 아줌마가 된 후에야 비로소 난 그때 남편이 내가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해 의기소침해진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이런 교훈을 난 이제 다른 남자에게 실습을 하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컬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사실 Y도 자신의 무뚝뚝한 모습을 아내가 계속 불평하자 부러 자상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한 번은 아내를 기쁘게 해주려고 큰맘 먹고 액세서리를 사 왔는데, 아내가 먼저 양복 주머니에서 그걸 발견하고 다짜고짜 어느 년에게 바칠 거냐고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그 이후로는 절대로 자상하게 굴지 않기로 다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Y는 이제 나에게 그 자상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게 남편과 아내의 비극일까?

연신 땀을 뻘뻘 흘리며 점점 절정을 향하고 있는데, 갑자기 대문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왔나봐.”           
“어떻게 하지? 자기 일단 화장실로 숨어.”   
대문에서 현관문까지는 불과 열 걸음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 없었다. 사뿐한 구두소리를 들으니 아마도 수정이가 벌써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원래 토요일은 정기적으로 가는 봉사활동이 있어 밤이 다 돼서 들어오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일찍 왔던 것이다.
“옷 좀 줘봐.”
“안 돼. 시간 없어. 얼른 가.”
난 낮게 속삭이며 Y를 다그쳤다. 그는 급한 대로 팬티만 걸친 채 침실 문 바로 왼편에 있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수정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 바로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는 난 화장실 문을 열어 Y를 불렀다.
“올라갔어?”
“응. 사실 요즘엔 얼굴도 통 안 비쳐.”
“큰일 날 뻔 했네.”
“그러게. 나도 십년감수 하는 줄 알았어.”
“얼른 옷 입고 나가자.”  
한숨 돌린 나와 Y는 다급하게 옷을 입고, 거실로 나갔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가 2층 화장실에서부터 여기까지 들렸다.
“얼른 들어가서 장사 잘 하고, 다음부터는 토요일에 와서 사람 당황시키지 말고 평일에만 와. 알았지?”
“알았어. 나도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지 뭐야.”
“그래, 얼른 내려가. 내가 문 잠글게.”
“밥은 꼭 제 때 챙겨 먹고, 푹 쉬어.”
나는 대문까지 그를 배웅하고, 태연하게 다시 거실로 들어왔다. 갑자기 다리가 휘청하고 속이 메슥거리는 게 갑작스런 상황에 너무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다시 침실로 들어와 TV를 틀어보니 아까 했던 영화는 벌써 끝나버렸고, 하나같이 예쁜 모델들만 나와 직접 속옷을 입고 판매하는 광고가 이어지고 있었다. 문득 난 고개를 숙여 축 늘어진 뱃살을 바라보았다. ‘너희들도 나이만 먹어 봐라’하는 괜한 시기심만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날 저녁부터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밤이 되자 빗줄기는 굵게 변했다. 덕분에 더위가 한 풀 꺾여 조금은 선선한 감도 돌았다. 남편은 태국으로 출장을 간 지 칠일 째였고, 수민이는 개강하기 전에 자격증을 딸 게 있다며 학원에서 집에 오자마자 또 다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혹시나 TV 소리가 새어갈까 싶어 침실에서 조용히 TV를 보던 난 시간이 벌써 자정을 넘었음을 확인했다. 웬일인지 수정은 깜깜무소식이었다.
‘혹시 수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수정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음성만 들릴 뿐 번번이 연결이 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단 수민의 방으로 올라갔다. 
“수민아, 누나 오늘 늦는대든?”
“몰라. 엄마, 나 공부 중이야.”
사춘기 후 지금껏 무뚝뚝한 모습만 보이던 수민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조심스레 수민의 방문을 닫은 후 난 1층으로 내려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 단 한 번도 연락 없이 늦은 적이 없는 수정이라 더욱 불안해졌다. 홀로 조용히 앉아 있으니 그동안 TV에서 보았던 납치와 성폭행 사건이 떠올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럴 때 남편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긴장한 상태로 소파에 앉아 있으니 노곤함이 찾아왔다. 두 시까지는 정신을 차리고 기다렸는데, 나도 모르게 설핏 잠이 들었나보다. 뻐꾸기시계가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시계는 벌써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깜짝 놀라 눈을 비비면서 난 무의식적으로 현관을 바라보았는데, 거기에는 수정이의 구두가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내가 깜빡 잠이 든 사이에 수정이 들어와 소파에서 앉은 채 잠든 날 깨우지도 않고 2층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내가 걱정했던 것을 뻔히 알만한 수정이 무턱대고 자기 방에 들어간 것을 생각하니 그동안 느꼈던 불안함과 걱정은 분노와 원망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윽고 난 연락도 없이 늦게 들어온 수정을 단단히 혼낼 각오로 2층으로 올라갔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계단을 오르려는 찰나 수정이가 큰 목소리로 통화하는 게 들렸다. 술을 잔뜩 마셨는지 발음은 정확하지 않았는데, 울먹이는 것 같기도 하고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한 모호한 목소리였다. 어릴 때부터 수정은 예의바른 모습 때문에 주위에서 늘 칭찬이 끊이지 않았던 아이였다. 그런 기대에 부응이라고 하는 듯 수정은 지금껏 말썽 한 번도 안 피운 모범생이었고, 대학에 가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은 딸이었다. 순간 난 과연 저 목소리가 수정이가 맞나 싶었다. 수정이가 무어라고 말하나 들어보려고 귀를 바짝 문에 대었다.
“왜 하필 그때! 왜 하필 그 때 내가 보게 만들었냐고! 흐윽…….”
문고리를 돌리려는 순간, 난 수정의 절규를 들었다. 분명 수정은 울부짖고 있었다. 지금껏 늘 강하고 담담한 모습만 보이던 수정이 울부짖으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난 아마 무슨 일이 생긴 수정이가 속이 상해 늦게 온 거라 짐작하고 통화내용을 잠자코 들어보기로 했다.
“그 날, 나 너무 기분 좋았단 말이야. 모처럼 토요일에 시간이 나서 장학금 받은 돈으로 백화점에서 엄마 아빠 선물도 사고, 교회 친구들 줄 선물도 잔뜩 사서 들어왔는데… 왜 팬티만 입은 남자가 안방에서 뛰쳐나와 화장실로 숨는 거냐고!”
순간 난 다리가 휘청거렸다. 오늘 낮, 수정이가 Y를 못 본 줄로만 알고 안심했었는데, Y가 팬티만 입고 화장실에 뛰어 들어가는 걸 뒤에서 목격했던 것이다.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온 몸에 식은땀이 나면서 오싹해졌다.
“나… 사실 엄마 핸드폰을 우연히 본 후부터 엄마가 다른 아저씨랑 바람피우는 거 알았단 말이야. 근데, 정말 인정할 수가 없었어. 우리 아빠가 너무 불쌍해서… 우리 아빠가 너무 안 돼서 인정하기 싫었단 말이야! 그런데 이게 뭐야? 차라리 내가 못 보게라도 하지. 그냥 못 본 셈 치고 싶은데, 벌거벗은 남자가 하루 종일 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어. 엄마가 다른 아저씨랑 그 짓을 하는 더러운 상상이 끊이지가 않는단 말이야! 차라리 내가 못 보게 하지… 차라리…….”
난 터져 나오는 울음에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뜨거운 눈물이 눈에서 쏟아져 내렸다. 차마 소리를 낼 수 없어 목에 힘을 주어 울음을 삼키던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창피함과 미안함, 죄책감과 함께 내 머릿속에는 수정이를 키우던 과정이 생각났다. 천장만 보고 있던 몸을 수정이 처음으로 뒤집었던 일, 옹알이를 지나 ‘어마마’라고 발음했던 일, 이층 베란다에서 떨어져 극적으로 살아났던 일, 피아노를 처음 배운 후 ‘어머님 은혜’를 직접 반주하며 노래를 불러준 일, 결혼기념일이라고 나와 남편의 이름을 수로 새긴 커플 속옷을 선물해준 일, 불과 얼마 전 학기 중에 아르바이트 한 것으로 식기세척기를 사준 일 등 수정을 키울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게 수정은 감격과 환희 그 자체였다. 한 순간도 실망시키지 않고 반듯한 딸로 자라주던 일 탓이기도 하지만, 방 한 칸 세내어 살던 그 시절부터 난 오직 수정에 대한 희망으로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엄마가… 엄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아빠한테 이럴 수 있어. 그런데… 그런데 더 화가 나는 건 내 자신이야. 엄마가 상처받을 거 생각하니까 나 엄마한테 아무 말도 못 하겠어. 아아아악! 정말 더럽다. 세상 참 더러워… 나 이제 어떻게 살아…”  
이 와중에서도 내가 상처받을 것을 먼저 생각하는 수정이 오히려 안쓰러웠다. 내게 차라리 화라도 내면 내 맘이 더 편해질 것 같았다. 이제 수정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수정이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니 내가 엄마라는 사실조차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생각 끝에 변명보다는 진심을 전하자고 결정했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 같다. 수정의 울먹임을 뒤로 하고 방으로 내려온 후, 감정을 정리하며 난 서랍에 있던 오래된 편지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수정에게 무작정 미안하단 말과 함께 한 번만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적었다. ‘용서’라는 단어를 쓰는 내 손이 왜 이렇게 떨리던지… 철없던 시절에조차 수정인 용서를 구할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오히려 내가 용서를 구해야하는 사실이 어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버거운 일이었다. 수정이가 받은 상처가 차라리 내 것이면 좋았을 것을…….

해가 중천에 뜬 일요일 오후, 수정이가 잔뜩 부은 얼굴로 내려왔다. 밤새 잠 한 숨 못잤을 텐데, 벌써 나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수정아, 밥 먹고 나가야지.”
“아냐, 나가서 먹을래.”
기운 없이 대답하는 수정을 보니 또 다시 죄책감과 미안함이 솟구쳐 올라왔다. 수정이 나간 것을 본 후, 난 수정의 책상에 편지를 두고 나왔다. 그리고 Y에게도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지금 서로에게 대하는 정성을 나는 남편에게, Y는 아내에게 쏟자는 말도 덧붙였다. 무슨 의도인지 알아챈 Y는 신사적으로 내 입장을 존중해 주었다.   
하룻밤이 지나고, 편지를 쓰면서 하염없이 울었던 밤을 보내고 나니 그래도 조금 머릿속이 맑아진 기분이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없었지만, 왠지 모를 희망이 날 사로잡았다. 일요일이라 그런 걸까? 기분이 좋아진 나는 모처럼 예쁘게 단장을 하고 근처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
“우리 손에 가진 것이 하나 없을 때, 세상에 혼자라고 생각되지만.”
교회에 도착하니 때마침 ‘가족’이라는 복음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우리에겐 예수님과 늘 함께 하는 가족 있으니.”
‘늘 함께 하는 가족’이라… 남편 때문인지, 수정이 수민이 때문인지, 난 그저 눈물만 흘리며 기도했다.
교회 성도들과 근처 공원에서 운동을 하다가 저녁 무렵에 집에 들어가니 웬 일로 수정이 거실에 있었다.
“엄마, 배고파. 나 밥 줘.”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달라는 수정이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집에 와서 편지를 읽은 게 분명했다.
“우리 수정이가 좋아하는 두부 부쳐줄게.”
프라이팬을 꺼내 두부를 부치는데, 자꾸 수정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우리 엄마, 살이 많이 빠졌네.”
마흔이 넘어 살이 더 쪘는데에도 수정이에겐 내가 왜소하게 보이나 보다. 그렇게 일요일 저녁 수정이와 말없이 저녁을 먹은 후, 난 다시 활력을 찾기로 결심했다. 수정이를 위해서도 남편을 위해서도 우선 몸부터 추슬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해질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여름 내 무거웠던 몸을 검진도 할 겸, 다음 날 오후 집 근처에 있는 종합병원을 찾았다. 바로 한의원으로 가서 진맥을 할까 했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처방을 받고 싶었기 때문에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진료과목을 내과로 정하고, 내고 의사와 상담을 했다. 그런데, 의사는 조심스럽게 산부인과 진료를 받아볼 것을 제안했다. ‘웬 산부인과?’라고 생각하는 순간, 올 해 들어 한 차례도 생리를 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평소에도 워낙 생리 불순이 심한 편이어서 주기가 좀 길어지나 싶었는데, Y의 얼굴이 생각나면서 덜컥 겁이 났다.
“김순옥 씨 들어오세요.”
친절한 간호사의 말에 따라 진료실에 들어가니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여의사가 서류를 바삐 작성하고 있었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의사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래 전부터 자꾸만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소화도 안돼서 밑에 층에 있는 내과에 들렀는데요, 상담 중에 의사선생님이 여기로 가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마지막으로 멘스 한 게 언제시죠?”
“평소에도 제가 워낙 생리불순이 심한데, 생각해보니까 올 해 한 번도 안 한 것 같아요. 혹시…….” 
“종종 식은땀도 나고, 어지럽기도 하시죠?
“네…….”
“만 나이는요?”
“마흔 셋이요.”
“증상을 보니 폐경일 가능성이 높네요.”
“폐경…이요?”
폐경이라니. 난 뜻밖의 결과에 당황했다.
“오늘은 여러 가지 검사를 해 보고, 다음 주에 결과가 나왔을 때, 만약 폐경이 확실하다면 조치를 취하도록 하죠. 우선 오늘은 자궁이 건강한지 내시경검사를 한 후에 폐경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 호르몬 검사를 진행할 것입니다. 자, 검사실로 가시죠.”
의사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이야기 했고, 나는 곧 간호사를 따라 검사실로 들어갔다. 내시경 검사를 마친 후, 채혈실로 이동해 피를 뽑고 다음 주 예약을 하고는 곧 병원을 나섰다.
병원 로비를 나서며 시계를 보니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집에 가는 길에 있는 마트에 들러 남편이 좋아하는 고등어와 아이들 먹일 불고기 재료, 그리고 밑반찬을 두어 개 구입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오니 태국으로 출장 갔던 남편이 돌아왔는지 현관에 구두가 놓여있었다. 도착예정일은 내일이었는데, 하루 빨리 오게 된 것 같았다.  
“여보 왔어요?”
난 서재를 향해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넸는데, 뜻밖에 남편은 침실에서 나왔다.
“응, 나 왔어. 잠이 쏟아져서 잠깐 눈 좀 부쳤네.”
“금방 저녁상 차릴게요.”
남편에게 살짝 미소만 지어보인 후, 장 봐온 것을 정리하려고 주방에 들어갔다. 오전에 깨끗이 정리해 둔 싱크대 위에는 묵직한 것이 담긴 검정 비닐봉지가 하나 있었다. 뭐가 있나 해서 봉지를 헤쳐 보니 동그란 아오리 사과가 예닐곱 개 있었다. 오른 손으로 사과 한 개를 움켜쥐고 배 근처에 쓸어 문지른 후, 반지르르해진 사과를 바라보았다. 윤기가 있는 것이 예쁘게 보였다. 내 얼굴도 희미하게 비치는 듯 했다. 사과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으니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과의 과즙과 향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그동안은 유독 자신이 좋아하는 사과만 사오는 남편이 미워서, 나에게 관심조차 없는 듯 보이는 남편이 야속해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과였는데, 사과를 한 입 먹고 보니 그 안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달콤한 맛의 세계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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