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뇌와 기억

기자명 김지현 기자 (kjhjhj1255@skku.edu)

‘망각의 강’ 레테(lethe)는 ‘완벽한 망각은 죽음과 같은 것’이라는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이름이다. 이는 곧 ‘lethal(치명적인)’과 ‘lethargic(혼수상태의)’라는 단어로까지 확장된다. 망각은 죽음과 연결되며, 거꾸로 기억은 삶과 동의어인 셈이다. 사실 인간은 ‘기억’을 함으로써 자아를 형성하고 사랑을 하고 삶을 꾸려 나간다. 존재를 풍성하게 만드는 기억은 어디에서 연원하는 걸까.

기억과 관련된 뇌의 부위는 변연계의 ‘해마’이다. 지름 1cm, 길이는 5cm에 불과한 해마는 1천만 개의 신경세포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전체 뇌세포 수가 1천억 개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일부의 세포만을 가지고 있는 해마가 모든 기억을 관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단 해마가 받아들인 외부 데이터는 중요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두고 기억되는데, 예를 들어 길에서 우연히 부닥친 사람의 얼굴은 5초간 기억되는 ‘순간기억’으로, 그 사람의 얼굴이 옛 친구와 닮은 경우에는 며칠까지 남아있는 ‘단기기억’으로, 다른 친구가 이 사건을 반복적으로 언급할 때는 ‘장기기억’이 되는 것이다.

기억, 신경세포들간의 네트워크 구축되는 과정
기억은 단순히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여진 외부 정보가 뇌세포에 저장되는 형태를 뜻하진 않는다. 학습인지개발원 최문주 연구원은 기억이란 “정보전달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축된 신경세포들끼리의 촘촘한 연결망”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 연결망과 관련해 최근 ‘신경전달물질설’과 ‘신경세포연결설’이 대두되고 있는데 신경전달물질설은 NMDA라는 수용체를 통해 기억과 관련된 신경전달물질이 다른 신경으로 전달되고, 반복학습을 통해 이 화학적 경로가 단순해짐으로써 신경세포간의 연결이 공고해져 기억으로 구성된다는 가설이다.

한편 신경세포연결설은 학습을 통해 기존 뇌세포 연결망에 다른 세포가 연결되는 식으로 기억이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뇌 전문가들은 이 두 요소가 서로 상호작용해 새로운 기억의 회로를 형성할 가능성이 많다고 말한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 △헤르페스 뇌염 △뇌졸중 등의 질병으로 해마 같은 기억저장소가 손상될 경우, 이러한 정상적인 방식으로 ‘기억’이라는 과정이 이뤄지지 않는다. 자연히 건망증이나 치매가 발병할 확률이 높아지고 심지어 자신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치매는 일시적으로 기억을 호출하기 어려운 건망증과 달리, 기억 자체가 삭제됨으로써 뇌 전체 기능이 떨어지는 완치불능의 병이기 때문에 철저한 예방이 필요하다.

적절한 기억의 ‘가지치기’ 필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기억’이 아닌 ‘중요한 기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 지금 이 순간 받아들이고 있는 모든 정보를 무턱대고 기억해야 한다면 뇌는 5분도 못 돼 한계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래서 뇌는 기억보다 ‘망각’에 익숙하다. 이에 대해 성모병원 이병호 원장은 “뇌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도록 설계돼 있다”며 “뇌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반드시 기억돼야만 하는 정보를 스스로 취사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독일의 실험심리학자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에 따르면 기억능력은 4시간 안에 급격히 떨어지며 시간이 갈수록 완만해지는 포물선을 그린다. 이에 따르면 학습에 있어서도 4시간 단위의 복습은 단기기억을, 1개월 이내의 복습은 장기기억의 활성화를 유도한다. 같은 내용을 반복하면 해마가 생존에 중요한 정보라고 여기고 이를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또한 기억내용에 감정이 개입될수록, 또 의식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길수록 같은 내용이라도 훨씬 더 잘 기억한다.

이처럼 기억은 우리가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기억을 다루는 효율적인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다면 학습 외의 인간관계,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내’가 ‘뇌’를 지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