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표면에 여울짓는 시간의 문양
유리의 표면에 여울짓는 시간의 문양
  • 이은지 기자
  • 승인 2008.11.03 13:39
  • 호수 1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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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조형예술가 이상민

정사각의 판유리 가운데 동그란 여울을 그리고 있는 투명한 물방울. ‘만져라, 반응하리라’라는 광고 글귀가 아니더라도 몽글몽글하게 생긴 것이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흐를 것 같아 보는 사람마다 꼭 만져 본다. 그러나 손에 와닿는 것은 매끈한 판유리의 표면 뿐. LG 휘센 에어컨 표면에 입혀져 낯익은 유리 조형 예술가 이상민의 작품은 이처럼 착시효과를 만들어 냄으로써 ‘12mm(판유리 두께)의 미학’을 구현한다.

이은지 기자(이하: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 조형예술대학교에서 유리 예술을 전공했다. 전공을 선택할 당시만 해도 한국은 유리 예술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는데 이같은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유리조형예술가 이상민(이하:민)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회화 전공이었지만 그림에 흥미를 못 느껴 프랑스로 유학을 가 무대의상을 공부했다. 부전공 개념으로 다른 전공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그때 알고 지내던 교수님 한 분이 내게 유리예술을 권하셨다. 처음에는 교수님의 제안을 쉬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당시 한국에서 유리예술이 전무했기 때문에 생소하게 다가왔을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에 겪은 상처로 유리에 대한 거부감이 컸기 때문일게다. 장난꾸러기였던 어린 시절, 공놀이를 하다가 깨뜨린 유리의 파편이 동공 아랫부분에 큰 상처를 냈다. 눈 수술 때문에 집 한 채 값을 날리고, 정상적으로 되기까지 말 못할 아픔을 겪은 내 사정을 교수님께 말씀드리자 ‘너의 독특한 체험 때문에 유리에 대한 접근이 남다를 것’이라며 더 권고하시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교수님의 예상이 적중해 전과까지 하게 됐고, 지금은 이렇게 유리 조형 예술가로서 작품 활동과 교육에 힘쓰고 있다.

은 그렇다면 유리를 다루면서 어떤 의미와 매력을 느꼈는지


나는 유리의 투과성을 참 좋아한다. 투명하기 때문에 안과 밖을 동시에 볼 수 있으니까. 즉, 유리에 비친 나 뿐 아니라 동시에 내가 유리 너머의 사물도 볼 수 있다. 게다가 독특한 경험으로 인해 남들이 비바람을 막고 따뜻함을 지키는 유리의 보호성만을 볼 때 나는 유리의 날카로움을 본다. 이처럼 어린 시절의 아픈 추억을 생각나게 한다는 점에서 유리는 현재와 과거를 대면하게 만드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현재 내 모습도 보이고, 이제는 추억인 과거의 내 모습도 보이고. 또 유리 작업을 할 때면 소리가 많이 나 귀를 막고 작업할 정도지만 작업 후 유리작품은 고요하고 냉정한 것이 관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흡사 오리가 수면 위에서는 유유자적 노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면 아래 부단히 발을 젓고 있는 것 같달까.

은 작품들은 하나같이 물의 파장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착시를 유발한다. 작품의 테마와 기법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파장은 관계성의 산물이다. 예를 들어 물수제비를 뜨면 고요한 표면 위 물의 문양이 드리워진다. 나의 돌팔매질에 잔잔한 수면에 파장이 일어남으로써 자연과 내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선택에 따른 행위가 삶의 파장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 삶도 이와 같지 않은가. 한편 착시는 추억의 성격을 형상화했다고 할 수 있다. 일찍 돌아가셨던 내 아버지와의 강렬한 추억인 물수제비 뜨기, 그리고 그 결과인 물의 파동을 표현했지만 판유리 안에 새겼기 때문에 만지면 만져지지도 않는다. 추억과 회상도 이와 같다. 기억에는 선명히 두드러져있지만 형체가 잡히지는 않듯이 말이다.

은 우리나라의 유리 예술은 서양에 비해 그 역사도 짧고 지평이 넓지 않은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실 유리 예술의 기법은 이태리 등 서양에서 온 것이 대다수이긴 하지만 예술 세계가 개방돼 있는 현대에는 역사가 짧은 것이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다. 그들에겐 세월에 걸쳐 인습이라는 것이 형성돼 자칫 거기에 얽매이기 쉽지만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의 작품 활동 또한 유리 조형은 입체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한 결과로, 보이기엔 입체적이지만 실상은 평면인 ‘유리 그림’이 됐다.

은 이상민씨는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길을 찾고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경험에 비춰봤을 때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한 대학생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상민씨는 現 남서울대학교 환경조형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 그렇듯이 요즘 대학생들의 최대 고민은 졸업 후 취직 걱정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과정으로 유리예술을 하게 됐고, 지금의 자리에 서게 됐듯이 미래 일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대학생들에겐 바로 앞에 놓인 고민, 즉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당신이 미래를 걱정한다면, 그 걱정할 미래는 바로 오늘이다. 신념을 마음 속에 확신하고 길이 없더라도 이를 추구하며 차근차근 노력의 실타래를 풀어나가면 곧 길이 보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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