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진가연 기자 (iebbi@skku.edu)

통섭 전성시대. 기사를 쓰면서 기자가 느낀 생각을 한 단어로 정리해본 것이다. 본지 학술면은 한국사회의 유행어이자 트렌드로 볼 수 있는 통섭을 다뤘다. 최재천 교수가 처음으로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책을 번역하면서 국내에 들어온 이 단어에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열광하는 것일까. 아마도 지금까지 문ㆍ이과로 나눠져 공부해오던 학문적 틀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예전부터 문ㆍ이과로 확연히 구분되는 이분법적 고등교육 제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돼 왔다. 그러한 교육을 받은 고등학생들이 대학에 와서도 자신과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려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불어 순수학문을 강조해왔던 대학에서는 융합 학문 전공자가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학문 간 장벽’은 견고한 대학문화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들은 이제 너도나도 글로벌을 외치며 세계와 소통하려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와 통섭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시점이 일치했던 것 같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은 △예술 △수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동시에 아우르는 인재가 필요하며 이러한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점점 특정 분야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을 다른 지식과 연결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사람들을 요구하고 있다.

대학에서 통섭의 시대를 맞이하여 다방면에서 우수한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인문계와 자연계 학문상호간의 서로 무지해지는 문제를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상지대 철학과 최종덕 교수의 말처럼 ‘통섭’이라는 말이 학계의 충분한 성찰적 논의 없이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기자가 보기에 통섭은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올바른 방향으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통섭을 통해 시대에 맞는 우수한 인재들이 나와 경쟁 사회에서 살아날 수 있는 힘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