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우리 학교 사학과 서중석 교수

기자명 이은지 기자 (kafkaesk@skku.edu)

 

다산경제관 32410호. 각종 역사 관련 서적으로 빼곡한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운 느릿느릿하고 구성진 목소리는 금세 그가 들려주는 과거로의 여행을 재촉했다. 한국 현대사 역사학 분야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자인 서중석 교수는 ‘지식인과 언론인, 학생 등 어느 계층보다도 지적 욕구에 목말라해야 할 사람들이 현대사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놀라워하며 현대사에 대한 현대인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다면적 역사관을 역설해오셨다. 너털웃음을 터뜨리시며 자신의 대학시절을 회상하시는가 하면, 안타까운 시절을 되짚으시는 대목에서는 금세 한숨을 쉬시는 교수님. 그는 비록 그 흔한 휴대폰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역사의 흐름과 자신의 삶의 궤를 고집스레 일치시키는 진정한 ‘현대인’이셨다.

 

※ 교수님의 독특한 말투를 조금이라도 더 담아내고자 사투리 표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1. 소년의 가슴 속,
      비판적 역사관이 움트다

■ 교수님은 유년시절에도 역사를 가까이 했는지 궁금해요
꼬맹이 때부터 옛날이야기를 참 좋아혔어. 내가 초등학생일 때 8살 차이나는 고3 형님이 대학 입학 준비를 위해 가지고 있던 역사 참고서를 내가 아주 열심히 봤거든. 중학교 이후로는 더 역사에 흥미를 가졌고 사학과 간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하고 있었어. 그러면서 역사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를 그럭저럭 나름대로 생각도 좀 허고 ‘우리 근현대사가 너무 일면적으로 쓰여지지 않았느냐,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없는가’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지. 역사 성적이 다른 성적보다 유난히 좋았기도 했고.(웃음)

■ 그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편향된 역사 교육이 행해졌을텐데 그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셨단 말씀인가요
그땐 근대사 같은 것도 거의 안가르쳤고 국사책이 있어도 마치 옛날 얘기 하듯이 가르쳤어. 고등학교 때도 불만이었지. 내가 알고있는 것보다 더 많이 가르치시는 것 같지를 않았거든(웃음). 그리고 나는 일제의 한국지배 같은 것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고 우리 근대사를 진보적인 각도에서 봐야한다. ‘너무 보수적인 각도로만 독립운동을 보면 안 되고 사회주의 운동 같은 것도 관심을 가져야한다’라고 생각했는데 고3 때 역사선생님은 나와는 생각이 달랐어요. 그래서 어쩔땐 선생님께 반발하는 얘기도 손들고 허고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그랬다고. 

#.2 ‘문리대의 뛰어난 괴짜’
      젊은 서중석

■ 교수님의 서울대 재학시절에 관한 일화들이 여러 책에 언급돼 있던데
어째 홍세화씨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통해서 젊은 사람들은 나를 아는 것 같아. 고집이 세다고 나왔다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는 노래 못하는 걸로 나왔고. 내가 67학번이기 때문에 일종의 좌장격인 때가 많았거든. 내 주장이 그렇게 강했던가봐. 주장이 안먹히면 나중에 또 주장하고 관철시켰다고 그랬더라고. 나는 기억이 안나는데 그 사람이 기억하는게 맞겠지. 하여튼간에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아주 강하게 밀고 나가는 그런 버릇이 있어요.

■ 그렇다면 입학 때부터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신 것인가요?
그렇지. 나는 입학 전부터 학문은, 특히나 그 중에서 역사학이라든가 사회과학은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냥 순수학문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고3 때 ‘러시아혁명사’라든가 ‘세계혁명사상’ 같은 책을 읽고 감명도 받고. 이미 대학교 사학과 면접시험 때에도 사학과 조교하고 토론도하고 그랬어. 그러니까 자연스레 대학교 들어가서는 학생운동ㆍ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서클에 들어갔지. 그러다가 6ㆍ8부정선거에 대한 후유증이 터졌어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하기 위해서 아주 심한 국회의원 부정선거를 저질렀거든. 그러면서 문리대, 법대가 데모를 시작했어요. 거기서부터 내가 참여를 한 거니까 대학 들어간 지 두세달 되고 6월 경엔가 데모를 시작한 거네.

■ 당시 캠퍼스 내 분위기를 짐작할 만 할 것 같은데요
우리 때에는 사실 강의 시간을 제대로 지키기가 힘들었다구. 강의 시작도 대개 4월 들어가면 했고, 6월 달 되면 대개 데모할 일이 생겨요, 데모하면 학교가 일제히 휴교해버리는거야. 그래서 그 당시에는 학교수업에 충실하기가 힘들었어요. 지금 학생들은 학점 때문에 아우성이고 그러잖아? 그때는 학점을 우습게 알았어.  F맞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그랬으니까. 그러나 나는 데모를 열심히 하려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게 지론이었지. 그래서 나는 강의를 잘 듣는 편이고 성적도 좋았어. (웃음)

■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도 치르시고 하셨는데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유신쿠데타가 났어요. 설악산 부근에서 훈련받을 때 그 유신헌법을 전부 다 읽어봤지. 세상에 이런 헌법이 있을 수가 있느냐.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거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제대를 했어요. 8월 하순에 학교에 다시 와 활동을 하는데, 후배들이 찾아온거야. 이거 가만있을 수 없지 않느냐고. 그러면서 그 후배들이 중심이 돼서 일으킨 게 최초의 반유신 대학 시위. 10월 2일 문리대 투쟁이에요. 옛날에는 데모한다고 하면 사람모으기가 참 힘들었는데 이건 그냥 대단하더라고. 모든 학생이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가졌었어요. 그래서 이 반유신 운동을 전국적으로 조직해야겠다는 생각을 나, 유인태, 이철 셋이서 이렇게 하게 됐지. 그래서 우리 세 사람이 중심이 되가지고 전국 조직에 들어갔고, 4월 3일날 크게 터뜨리겠다고 했는데 정부에서 먼저 잡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발표한 게 민청학련사건이었어. ‘화염병 같은거 만들고 폭력투쟁을 일으켜서 정부를 전복해서 좌익정권을 세우려 했다’며 엄청나게 확대하고 과장해서 발표했지. (한숨) 그 사건으로 인혁당 여덟명이 희생됐지……. 이 사건을 겪으면서 정권 유지를 위해서 극단적인 방법과 논리로 학생들을 희생시키고 반대파를 사정없이 없애려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더 강하게 가졌지.

#3. 진실한 현대사로의
     고집스러운 열정

■ 기자 생활을 10년간 하셨는데, 이 때의 경험이 현대사 연구에 영향을 미쳤을 것 같아요
그때 참 열심히 살았지. 그 당시는 80년대 농민운동이 막 시작될 땐데, 농민들이 열심히 일하는데도 정부정책의 실수로 억울하게 빚을 많이 진다든가 하는 일이 많았거든. 그런 취지의 글을 신동아에 여러차례 썼었고. 학생운동에 관해서도, 그리고 사북이라든가 태백 가서 광부들의 열악한 상황과 노조를 만드는 과정 등을 취재해서 신동아에 쓰고. 그게 나중에 80년대 민중의 삶과 투쟁이라는 책으로 나오고 그랬지. 이전에도 농촌 출신이기도 했고 농활을 많이 해봤지만 취재와는 또 다르더라구. 이렇듯 일반 민중과 서민이 어떻게 살고있는가를 생생하게 취재할 수 있었으니까. 민중 속에 직접 뛰어들어 취재를 하면서 현대 한국사회에 대한 공부를 저절로 할 수가 있었지.

■ 현대사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 인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떤 자리에서 누가 그래. 우리 현대사에서는 부정적인 것이 많기 때문에 보고싶지도, 공부하고 싶지않다고.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지. 왜냐하면 근대 초기는 열강들의 침략, 20세기 전반기는 일제 강점 하에 놓여 꼼짝 못하는 시대로 인식될 수 있었으니까. 해방 후에는 좌우 대립과 남북 분단과 같은 상황에서 독재 정권까지 들어서는 과정에서 갖가지 파행적인 정치 현상이 일어난다고 이해할 수도 있거든.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근대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가 싶거든. 우리 사회를 좋게 맨들기 위해서 얼마나 역동적으로 국내 뿐 아니라 만주, 시베리아, 미국, 일본 각지에서 한국인들이 많은 활약을 했는가 보면 긍정적인 요소도 많거든. 더군다나 해방 이후는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달성한 드문 역사를 지닌 성과를 거둔 측면이 있잖아. 이처럼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면을 높이 평가하되, 부정적인 측면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 드러내서 이를 비판하고 반성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이랄까 정신적 역량이 생겼다고 봐. 과거처럼 숨기려던가 왜곡시킨다던가 그럴 필요는 없지.

#4. 현대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세

■ 지난 현대사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할 때, 미래를 대비하는 한국인의 자세는 어떠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우리는 뛰어난 기술적 자질 교육에 소홀한 면이 있어. IMF도 그렇고 대량생산과 평준화된 사회 속에서 열심히 뛴다는 생각만 있었던거지. 따라서 현대인들은 대중사회에 휩쓸리는 것을 줄이고 창의성을 발휘할 줄 알아야해. 개성, 창의적 활동, 남과 다른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체계를 갖추지 못하면 정체된 사회로 머물기 십상이거든. 대학생들의 경우에도 무조건 남이 허는 것 보다도 자신의 개성 속에서 무엇을 단독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 지식도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가 영어나 컴퓨터 같은 것들을 요구하는 곳이 많아 여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데, 문화교양지식도 많이 쌓아야 해. 우리 사회는 수출과 수입이 GDP에서 상당히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나라인데, 그만큼 다양한 문화를 이해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거든. 자기분야의 전문적 능력을 갖추고 역사와 문화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쌓아야 해.

■ 끝으로 젊은이들에게 요구되는 시대적 자세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리가 근래에 와서 참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됐어. 내가 젊었을 때는 20년 후면 세상이 좋아지고 젊은이들에게 밝은 세상이 다가갈 것이다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지금와서 보니 희망찬 사회를 맞지 못해 미안해하고 있지. 오히려 취업, 경제적 문제에 더 고민하는 것 같아. 어떻게보면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들 못잖게 타협하며 쉽게 살려고 하는 모습이 있어 아쉬워 젊은이는 이상을 가져야 해요.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한다’라는 방향성을 정립하고 민주주의나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도 생각해야해. 또 ‘우리사회가 어떤 역정을 거쳐왔는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젊은 사람들 나름의 정의감을 살려야 하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다잡는 자세가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