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기자명 이성준 기자 (ssjj515@skku.edu)

 


눈을 감고 부산을 떠올려보자. 야구, 항구, 해운대 등 우리가 부산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다양하고 풍부하다. 그렇다면 해외 영화인들에게 부산에 대해 묻는다면 어떤 답이 나올까. 답은 부산국제영화제(이하:PIFF)일 것이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겨울날, 아시아를 넘어 세계 영화제에서 그 위상을 떨치고 있는 PIFF의 김동호 집행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PIFF 사무실을 찾았다. 그의 얼굴에 남아있는 주름만큼 깊고 굴곡 있는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인생의 동반자, 영화를 접하기까지

■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나
어릴 적이라는 말을 접하면, 중학교 1학년이던 해에 6ㆍ25전쟁이 발발해 피난을 다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고향을 떠나 부산에 내려갔고, 전쟁과 가정형편의 악화 등으로 인해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휴전이 된 후에 서울로 올라가 생활하게 됐지만 그곳 역시 부산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현재는 영화를 보거나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등 문화적으로 풍요롭게 지내고 있지만, 학창시절의 나는 영화 한 편 보기 힘들었다. 생각해보니 대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제대로 된 영화도 못 본 것 같다.

■ 공직생활을 하면서 영화를 접했다고 들었는데
대학교 시절 제대를 하면서 문화공보부에 들어갔다. 관료로 일하면서 내가 일하는 분야에 대해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서울대학교 대학원과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을 공부했다. 이곳에서 관료생활을 26년 간 한 다음 영화진흥공사 사장이라는 다소 무거운 자리에 앉게 됐다. 대학원에서 영화법이나 영화정책 등에 대해 배웠던 것을 기초로 영화발전에 기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 갑작스럽게 영화진흥공사의 사장이 됐기에 영화인들의 반발도 만만찮았을 것 같다
영화진흥공사 사장이라고 하면 한국의 영화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이기에, 처음에는 영화인들의 반대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당시 감독협회에서는 나에 대한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나설 정도였다. 영화와 관련도 없는 사람이 그 단체의 사장을 맡게 됐으니, 낙하산이니 뭐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해결하고자 영화에 대한 공부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영화도 많이 보기 시작했다.

#열정, 영화와 만나다

■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서 한 일을 알고 싶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 처음으로 든 생각은 한국영화에 기여해야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초기 3개월 동안은 원로 영화인, 젊은 영화인을 비롯해 정부의 영화정책에 우호적인 사람, 비판적인 사람 모두를 만나 그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그 결과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큰 규모의 종합촬영소가 없다는 점임을 알아냈다. 그 후 곧바로 종합촬영소를 건립하기 시작했고, 결국 45만평 규모의 남양주 종합촬영소를 탄생시켰다. 그 다음으로 시작한 일은 우리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일이었다. 한국영화를 서서히 알려나가기 위해서 당시 소련과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루마니아, 몽골과 같은 나라에서 순회상영을 하기 시작했고, 서서히 한국영화를 알려나갔다. 그 후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상영한 임권택 감독의 ‘아다다’가 해외영화 전문가 및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배우 신혜수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점차 국제사회에서 한국영화의 위상을 높여갔고, 초기 나에게 적대적이던 영화인들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 시절 많은 일이 있었다는데
공직생활 마지막에는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게 됐다. 위원장의 자리에서 그동안 검열에 걸려있던 영화들을 살펴보니 부당하게 금지돼 있는 작품들이 상당수라는 것을 알게 됐다. 공산주의를 찬양한다는 이유로 세르게이 아이젠슈테인 감독의 ‘전함포텐킨’, ‘10월’과 같이 예술성 있는 영화가 국내에서 상영 금지됐었다. 따라서 이런 영화들이 상영될 수 있도록 했다. 그밖에 기억에 남는 일은 국내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영화 ‘크라잉 게임’의 상영이다. 영화 내 성기노출이 금지돼 있던 한국에서 최초로 상영된 성기노출 영화라고 불리는 그 영화 말이다. 오랜 고민 끝에 해당 장면을 삭제해버리면 영화의 의미가 없어져버린다는 결론을 짓고, 힘든 결정을 내렸었다. 물론 이런 나의 행동을 정부에서는 달가워하지 않았고 결국 위원장직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제2의 영화인생

 


■ 현재의 위치에서 PIFF는 본인에게 어떤 존재인지
문화공보부와 영화진흥공사, 공연윤리위원회를 거치면서 공직에서만 약 30년의 세월을 보냈고, 그 후 내 영화인생의 전환점이 된 PIFF에 집행위원장으로 가게 됐다. 이때부터 완전히 영화인이 됐다고 느꼈으며, 후회 없이 내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다.

■ PIFF는 다른 영화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영화제는 일반 극장에서 접하기 힘든 영화들을 선정해 일반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자리를 말한다. 할리우드 영화나 기타 대중적인 영화는 접하기 쉽지만 독립영화나 단편영화 등은 대중들이 관람하기 어렵기에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다만 중요한 점은 이런 영화제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각 영화제마다의 정체성이 확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제마다 각자의 특별하고 참신한 점이 없다면 그 영화제는 빛을 볼 수가 없다. PIFF는 아시아의 신인감독을 발굴해내고 아시아의 영화산업을 지원해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독특한 점이 있기에 짧은 시간 내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 부산시에서 예산을 지원받되 간섭은 받지 않는다는데
초기부터 부산시는 PIFF에 필요한 예산의 1/7수준만 투자했다. 나머지 자금은 주로 기업체와 같은 스폰서를 통해서 조달했다. 정부나 시로부터 너무 많은 예산을 받다보면 필연적으로 정부의 간섭을 배제할 수가 없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영화제를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하지만 스폰서로부터 자금의 대부분을 받다보니 해외 영화제에 비해 턱없이 예산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베를린이나 칸 영화제의 경우 PIFF예산의 약 3.4배에 이르는 비용을 지원받는다. 이와 같은 예산상의 문제로 인해 영화제에 초청하고 싶은 감독들이나 배우들을 불러오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해 안타까운 적이 많았다.

■ PIFF 상영작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무엇인가
솔직히 우리 영화제에는 좋은 영화가 많이 들어온다. 일일이 마음에 드는 영화를 말하기란 불가능할 정도다. 작년 영화제에서는 3백55편의 영화를 상영했는데, 그 중 PIFF에서 최초로 공개한 영화가 98편이나 됐다. 즉 그 영화의 감독들이 각자의 모국이나 칸, 베를린 등의 영화제를 뒤로하고 부산을 선택했다는 말인데, 이는 PIFF의 위상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영화들이 모두 소중하고 기억에 남는다.

■ 광주나 제천 영화제 등 국내 영화제들이 많은 고충을 겪고 있는데
앞에서 언급한대로 영화제가 명맥을 이어나가기 위해선 그 영화제만의 개성이 있어야 한다. PIFF는 본연의 색깔을 유지ㆍ발전시켜나갔기에 지금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천의 경우 판타스틱 영화제에 맞는 색을, 제천은 음악영화제에 맞는 고유한 색을 보존해나간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 최근 집행위원장 자리를 물러난다고 했다
지금까지 15년 동안 쉬지 않고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 자리에서 물러나면 다른 누군가가 PIFF를 지휘하게 될 텐데, 아마 이것이 PIFF의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 어떤 일이든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며 이를 통해 한 단계 도약해야 한다. 앞으로의 PIFF가 지금보다 더 발전해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 은퇴 후 계획은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아직까지도 꿈이 많다. 우선 영화를 제대로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 한 두 편 정도를 남기고 싶다. 또 미술활동도 시작해 좋은 작품을 남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가장 하고 싶은 일을 꼽으라면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정리해보는 책을 만들어보는 일이다.


#자세, 신념 그리고 메시지

■ 인맥을 통해서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행사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외부기관들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더구나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과 기업을 만나는 것이 절실했다. 이런 부분에 관료시절 쌓은 인맥이 효과를 발휘했다. 정부나 기업의 관계자들을 만나 협상을 진행할 때 인맥이 없었더라면 PIFF를 유치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평소에 많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어울렸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모르는 사람을 접할 때는 내 진솔한 마음을 드러내면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미 만들어진 인맥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인맥을 만들어내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 어려움을 극복한 신념과 자세에 대해 듣고 싶다
내가 보기에 나 자신은 외유내강형이라 생각한다. 겉으로 보기엔 한 없이 부드럽지만 일할 때는 끝까지 원하는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 말이다. 어떤 일이든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성과를 낼 수 있다. 또한 기초를 중시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모든 분야의 일은 기초를 바탕으로 해야만 창의력의 발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작정 새로운 정보와 기술 등을 습득하려 하기보다는 하는 일의 기초를 알고 접근하는 것이 우선이다.

■ 대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대학생 시절이란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화끈하게 하기 바란다. 대학생 때가 아니면 앞으로 더 좋은 기회가 없다. 직장에 들어가면 여행 한 번 가기도 힘든 게 사실이다. 가능한 많은 일을 하면서 경험을 쌓는 일이 중요하다. 또한 원 없이 책을 읽으며 기초학문에 매진하길 바란다. 경쟁사회에서 아이디어는 생존을 위한 유일한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아이디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기초학문의 전문가가 돼야 한다. 기초를 중심으로 새로운 뭔가가 탄생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는데, 사람의 생각과 학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을 두려움 없이 해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