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및 극작가 하동 천승세

기자명 김영인 기자 (youngin09@skku.edu)

“가장 짐승 답게 찍어줘”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질문에 이어진 그의 대답이었다. 거친 리얼리즘 소설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필연적으로 문학적 재능을 이어받은 그. 바로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하동 천승세다. 그를 수식하는 말은 너무나 많지만 정작 본인은 글쓰기에 미치고 현실에 미친 짐승임을 자처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오후, 목포의 명물이라는 삼학도가 한 눈에 보이는 한 횟집에서 그를 만났다.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과거를 회상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하는 그는 역시, 짐승이었다.

#1 문학의 피를 이어받은 삶

■ 여류작가 박화성선생님이 어머니인데
그래서 내가 글을 쓰게 된 거다. 그 피를 물려받았으니까. 그 놈의 피를 왜 받았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웃음). 어머니의 문학적 재능 뿐 아니라 고집도 물려받았다. 혈육 관계를 떠나서 내 어머니만큼 고집스럽게 역사를 산 여성은 많지 않다. 어머니는 자신의 문학적 지조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어머니가 글 쓰는 사람으로 가장 이름 높았을 때 조선 총독부에서 기관지 발행과 관련해 도움을 요청했다. 다섯 배의 원고료와 명예 획득을 제시했지만 어머니는 그 길로 글쓰기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쉽지만 그 당시 총독부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어머니의 이런 면을 닮고 싶었고 또 닮았다.

■ 같이 문학을 한다는 점에서 어머님과 갈등도 있었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모자 관계라고 해도 작가로서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예술의 본령이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자의 문학적 개성도 조금씩 달라 서로의 작품을 비판하거나 한 문제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어머니와 비슷한 형질을 갖고 있어 많은 부분에서 깊은 공감을 이뤄냈다. 어머니와의 이런 관계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었다.

#2 글로 세상을 담다

■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으로 글을 선택한 이유는
원래는 글을 쓸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 당시 작가를 자처하는 사람은 죄다 비리비리한 사람들뿐이었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수놈으로 죽어야지 약한 남자가 되기는 싫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적다운 적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무장이 되고 싶었다. 일부러 글과는 먼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1957년 어느 날, 어머니가 누이 집을 방문하기 위해 며칠 동안 집을 비우셨다. 그런데 무엇에 홀린 것인지 갑자기 글을 쓰게 됐고, 어머니 몰래 누군가의 의견을 듣고 싶어 제출했다. 장난스럽던 내 행동은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이어졌고, 그 길로 등단하게 됐다. 벼락 맞은 거다(웃음).

■ 한동안 언론계에 종사했는데
1969년 한국일보에서 주간 한국의 발행을 위해 필력 좋은 사람들은 특별 채용했다. 거기에 내가 낀 거다. 우연하게 입사했지만, 역시나 신문사 생활은 체질적으로 내게 맞지 않았다. 방황하며 생활하던 중 한 편집국장이 “당신이 발자크야?”라며 내 기사의 리드를 모욕했다.  내가 잘못한 것을 지적하면 고칠 수 있지만 나를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1972년에 그만뒀다.

■ 본인이 어떤 작가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소설가 이전에 수컷으로 태어났고, 현재도 역시 수컷이며, 수컷으로 죽을 것이다. 정령을 위해 순교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수컷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몰입하고 있다. 나는 컴퓨터도 모른다. 구시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죽을 때까지 연필로 써오던 나의 본을 지킬 것이다. 글씨를 쓰는 손가락 끝까지 나의 혼이 도달할 때만큼은 문학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해가 등단한지 54년째인데, 그동안 원고지와 연필 외의 것을 사용한 적이 없다. 나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 언제나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박아왔다. 나는 고집스럽게 몰입하는 작가다.

#3 바다, 작품이 되다

■ 목포에서 태어나고 지금 또 다시 목포다. 바다 영향을 많이 받았겠다
바다는 너무나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똑같은 바다지만 육지와의 거리나 수심에 따라 수시로 변화해 늘 나를 놀라게 한다. 내게 바다란 어머니의 양수와도 같은 것이다. 생명의 근원이다. 어머니가 없다면 어떻게 생명이 잉태되고 탄생이 이뤄지겠나. 바다도 마찬가지다. 바다는 내 소설과 삶의 태반이자 요람이다. 그러나 목포바다는 이상하게 어머니의 모유 같다. 모유빛깔 목포바다를 보고 성장을 이뤘기 때문일까.

■ 바다를 경험하기 위해 목숨 걸고 원양어선에 올랐는데
배의 출발을 알리는 뱃고동이 울리자, 나 같은 놈도 눈물이 나더라. 밥조차 제대로 먹이지 못한 자식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도대체 소설이 무엇이기에 내가 이런 것 까지 해야 하는지 생각하다보니 괜스레 내 삶이 서글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나가니, 하루하루가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잠시 배를 묶어둘 곳조차 없기에 심한 파도와 태풍을 만나면 그저 도망 다닐 뿐이었다. 매일 매일 죽을 고비를 넘겼고 귀향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 바다가 그립다. 생의 마지막에서도 담담하던 선원들이 보고 싶다. 그 바다에 나가서 그들과 함께 죽고 싶다.

#4 민족성대 인생

■ 등단 후 우리 학교로 편입했는데
현 중앙대의 전신인 서라벌 예술대에서 공부하다 3학년으로 편입했다. 그 당시에는 신춘문예 당선이 학교의 명예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그래서 여러 대학교에서 날 데려가려고 했다(웃음). 그 중 박종화 선생의 권유에 따라 고전문학의 최고를 달리는 우리 학교 국문과에 진학하게 됐다.

■ 우리 학교에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맞았다고
김구용 선생을 만난 것이다. 그는 시인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인간적으로도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와는 다방에서 만나던 문우였는데, 성대에 편입하고 그의 고전 문학 특강을 듣고 싶어 강의실로 갔다. 그랬더니 그가 나에게 다가와서 “나가세요. 이게 무슨 망동입니까. 내 강의는 듣지 마세요. 나는 강의를 못 해요.”라고 속삭였다. 비록 사회적 위치는 교수와 학생이지만, 글을 통해 사귄 사이에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배우냐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얼마나 멋진 겸손의 모습인가. 아직도 그처럼 아름다운 꽃을 본 적이 없다.

■ 아쉬운 점도 있다고 들었다
과거에는 성대와 나를 연관 짓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만큼 내가 상징하는 바가 컸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후배들에게 강의를 하거나 어떤 주제로 의견을 나눈 적이 없다. 내 소신껏 행동하다 반체제의 꼬리표를 달게 됐기 때문이다. 편견 가득한 사회적 시선은 당연히 내가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지만, 모교에서 조차 색안경을 끼고 본 것 같아 속상하다.

#5 과거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다

■ 우리나라 학생운동의 불씨를 지폈다고
내가 살아오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딱 하나있는데, 바로 우리 학교에 민주 동문회를 만든 것이다.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의 피 끓는 경험이었다. 우리 학교의 민주 동문회가 시작되자 전국의 여러 대학교에서 민주 동문회가 만들어지게 됐고 전국의 대학생들로 이뤄진 3만8천의 대호를 꾸렸다. 만약 우리 학교의 민주 동문회가 없었다면 감히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몇 해 전 그 때 함께 했던 아이들과 만날 일이 있었는데 아이들 모두 그 당시의 마음을 잃지 않고 있더라. 세상에 굴복하지 않은 것이다. 외로울 때 마다 그 아이들을 생각한다. 그 아이들은 내가 죽었을 때 유일하게 위로받고 싶은 사람들이다.

■ 1989년 남북작가회담을 추진했다 무산 됐다
이미 정부의 탄압에 의해 못 갈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러나 안 된다고 미리 포기하는 것만큼 나약한 모습도 없다. 역사적으로 시도는 변화의 불씨가 됐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하는 것에 목적이 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견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 요즘 문학판에는 치열함을 찾아 볼 수 없다고
국내에서 문인을 자처하는 사람의 수가 주한 미군의 수보다 많다(웃음). 그렇게 많은 사람 중 진정으로 글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운명적으로 타고나지 않았음에도 정치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문예걸인들이 많다. 그들은 현실에 대한 참여, 실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 진정한 역사의 서사 앞에서 그것을 실증하는 예술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6 궁극적 목적은 구원

■ 작품을 창작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은
예술적 창의와 문학적 발상을 통해 주제를 선정하고, 그 주제를 얼마만큼 소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늘 고민한다. 훌륭한 작가는 산문의 다양성을 지니며, 묘사의 기교를 통해 얼마만큼 그 상황을 그려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능력을 갖춘 다음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들을 풀어낸다. 서민이나 양심적 지식인들과 같이 서사적으로 삶다운 삶을 산, 땀 냄새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

■ 창작 활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내게 소설은 삶의 구원이자 동시에 역사의 구원이다. 이를 위해 최고의 리얼리즘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단순히 현실 공간의 반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사회와 연결돼 ‘구원의 미학’을 실현하고자 한다. 50여 년을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겠는데, 죽을 때가 다 됐다. 알 만하니까 죽어야만 한다(웃음). 문학은 너무나 어렵다. 문학가의 길은 너무나 외롭다. 그러나 1백번을 다시 태어나도 외롭고 비참한 소설가가 되겠다. 몇 번의 생을 산다 해도 문학은 나의 시작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 후배들은 어떤 삶의 태도를 지니길 바라나
정의롭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주기 바란다.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새로운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과도 이어질 수 있다. 더러운 사회 철학을 갖지 말고 ‘민족 성대’의 정신대로 건강한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기 바란다. 현재는 위기 사회다. 겉으로는 잘 굴러가는 것 같으나 속을 들여다보면 각 분야 간의 연계가 없다. 서로 잘났다고 앞으로만 나가는 모습이랄까. 우리는 유기적인 사회를 꿈꿔야 한다. 각 방면에 모든 것이 유기적 고리처럼 연결돼 있는 것, 연동성을 갖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고 언제나 깨어있기 바란다.

<약력>
ㆍ목포 출생, 목포고, 성균관대 국문과
ㆍ195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점례와 소> 당선
ㆍ희곡 <만선>으로 제1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ㆍ<황구의 비명>, <폭염>으로 제 2회 만해문학상 수상
ㆍ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
ㆍ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글 : 김영인 기자
사진 : 윤이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