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자아실현<생계유지'… 노동을 바라보는 안목 키워야

기자명 고두리 기자 (doori0914@skku.edu)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묻는다. ‘노동(勞動)’을 통해 흘리는 나의 땀 한 방울이 희망을 의미하는지, 고됨을 의미하는지. 노동은 우리의 삶에 이미 깊숙이 파고들어 분리할 수 없는 보편적인 현상이자 행위이다. 노동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인 동시에 개인의 꿈, 목표, 사회적 지위 등 다양한 측면을 드러낸다. 이처럼 인간의 삶을 규정짓는 ‘노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자아실현 VS 생계유지

‘왜 노동을 하는가?’에 대한 물음의 답변에 크게 자아실현과 생계유지를 꼽을 수 있다. 먼저 노동이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관념론적 관점을 살펴보자. 데카르트는 자연의 힘을 정복해 그것을 인간의 수단으로 바꾸고, 문화를 형성하는 것은 노동으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헤겔 역시 노동은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필수적인 구원 수단임을 강조했다. 이들은 자신의 발전을 위한 활동이 노동이라 보고, 이것 자체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주장했다.
반면 노동이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학자들은 인간이 끝없는 욕구에 도달하기 위해 노동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노동이 ‘고문’을 의미하는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즉 노동은 원래부터 고통스러운 활동을 뜻한다는 것이다. 노동은 자유와 여가의 희생을 감수하고 생계수단을 확보하는 수단적 활동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니체는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한 단순하고도 반복적인 노동은 인간의 사고, 관조, 꿈, 사랑 등의 본질적 가치를 변질시킨다고 말한다. 덧붙여 그는 이러한 노동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능력을 마비시키고, 자아의 상실을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사실 역사 속에서 인간이 언제나 노동을 중시했던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노동은 인간 삶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이것은 노예들이 하는 저주받은 행위라 경멸했다. 『성경』은 노동을 신이 내린 형벌로 묘사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노동의 목적이 여가를 얻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노동과 여가가 분리된 이분법적 사고
산업사회로 이행함에 따라 노동의 필요와 중요성은 점점 증가한다. 그러나 지나친 물질적 이해관계에 얽혀 사회는 삭막해졌고, 수단이어야 할 물질이 목적시 되면서 그릇된 노동관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노동 속에서 즐거움과 만족을 찾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번 돈으로 여가나 재화를 소비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 이래 개인은 자아실현을 위한 노동을 탐색하는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노동은 단지 여가를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고, 노동과 여가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간주하게 됐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오늘날 현대사회로까지 이어진다. 문명비평가 루이스 멈퍼드는 “원래 일과 놀이는 공통된 줄기에서 나온 것으로 분리될 수 없다”며 오늘날 노동과 여가가 별개로 분리된 것에 대해 비판했다.
산업혁명의 개시와 18, 19세기 기계의 발전이 고된 육체노동을 제거하긴 했지만, 그에 따라 노동의 의미는 단순화됐고 노동을 추구하는 이유 역시 협소해졌다. 이로 인해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적 노동 형태를 낳게 된다. 마르크스는 분업화된 노동 과정에서 인간은 전체 생산 과정 중 일부분만 담당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충족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수단화해 노동 과정에서 소외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자본주의 특성은 ‘노동’ 본연의 의미를 희석시키게 된다.
하지만 앨빈 토플러는 『전망과 전제』에서 노동에 대해 희망적 전망을 제시하기도 했다. 인간이 담당했던 노동을 기계가 대신하면서, 노동자는 좀 더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일을 할 수 있게 돼 단순하고 반복적인 노동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뉴욕 록펠러센터 건설현장 철빔 위에서 점심 휴식 중인 건설 노동자들 / Lewis Hine 1932

노동의 의미는 자신의 선택 
그러나 오늘날 현대 사회는 앨빈 토플러의 전망처럼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오히려 현실은 생산의 자동화로 영속화된 실업을 급속도로 확산시키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한 제러미 리프킨의 주장에 더 어울린다.
오늘날 청년실업이 사회문제로 대두하면서 대학생들 역시 하루빨리 취업하기 위해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다. 노동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하기 보다는 돈을 버는 것이 우선시되는 현 사회의 모습이다. 노동 자체에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무미건조한 행위로 인식하는 오늘날 현대인에 대해 철학자 베르그송은 “우리는 시간 대부분을 자기가 아닌 외부를 위해 바치고 있다”며 “진정한 자기에 관해서는 모르고 수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고작이다”고 비판했다. 그는 자유로이 행동을 한다는 것이야말로 바로 자신의 소유권을 되찾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이제 사회로 나가 곧 ‘노동’을 경험하게 될 대학생들은 노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한국희(경제08) 학우는 “오늘날 대학생은 노동 자체에 대해 즐거움을 느끼기보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며 “오히려 노동보다는 여가활동을 통해 자아실현이 수월해졌다”고 생각을 표했다. 이는 우리가 앞서 언급했던 오늘날 노동의 의미와 비슷하다. 이와는 조금 다른 생각으로 강덕현(경제05) 학우는 “우리가 노동하는 이유는 나의 만족을 넘어서 사회효용을 늘리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닐까”라며 넌지시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이처럼 노동의 의미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냐에 따라 노동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아니면 아무 의미 없이 노동에 매달리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앞으로 각자 인생에서 노동과 직업이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나는 왜 일해야 할까?’, ‘내 삶에 노동은 어떤 의미인가?’ 등의 질문을 끊임없이 하면서 자신의 노동 목표가 올바른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화 『모던 타임즈』의 주인공 찰리 채플린처럼 톱니바퀴에 끼여 ‘나’를 위한 노동이 아닌, 무의미하고 건조한 노동을 계속 영위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