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 독해 뛰어 넘어 개인의 의미 창출해야

기자명 고두리 기자 (doori0914@skku.edu)

찰칵. 카메라 셔터음이 울리는 동시에 순간의 찰나가 기록된다. 카메라에 포착된 시간은 뷰파인더에 갇혀 상징적인 ‘죽음’을 맞이하지만, 이 죽음은 사진 속에서 다시 태어나 이내 영원한 삶을 얻는다. 사진 속에 담긴 피사물이 지금은 부재하지만, 그것이 ‘존재했음’을 뜻하는 사진의 노에마(Noema)가 실현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사진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사진의 구도, 기술적인 측면만을 가지고 사진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간단한 작업이 아닌 것이다. 여기 20세기 후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그의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의 본질을 치밀하게 탐구한다. 그가 내세운 두 개의 개념,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은 이후 사진 이론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의 틀에 따라 사진을 읽어내는 방법은 우리가 오늘날 흔히 행하고 있는 사진 감상법이다. 바르트는 이를 스투디움이라 명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사회적 약속’에 의한 기호이듯이, 사진에서의 스투디움 역시 누구나 공감하는 객관적인 의미 속에서 이해되는 문화적 코드이다. 스투디움을 알아본다는 것은 사진을 사진작가의 의도대로 바라보는 것을 뜻하고, 보는 이는 단지 구경꾼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설령 어떠한 감동이나 재미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사진 읽기에 있어 스투디움은 매우 중요하다. 스투디움을 알지 못할 경우, 사진 속 이미지가 곧 현실세계라는 수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투디움만으로 사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에 바르트는 스투디움과 반대되는 개념인 푼크툼을 제시한다. 푼크툼은 보편적이고 분석적인 맥락 이전에 보는 이의 개인적 취향이나 경험, 잠재의식 등과 연결돼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강렬한 자극을 말한다. 그는 “스투디움은 언제나 궁극적으로 약호화돼 있지만, 푼크툼은 그렇지 않다”며 “내가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나를 진정으로 아프게 할 수 없지만,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은 혼란의 좋은 징후”라고 말한다. 푼크툼은 사진을 보는 이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경험을 동원하면서 스스로 사진의 의미를 구성해가는 ‘시니피앙스’를 느끼게 해준다. 사진의 진정한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듯 푼크툼은 지극히 주관적 감정이므로 푼크툼을 밝히는 것은 나 자신을 발가벗는 일이기도 하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바르트가 『밝은 방』에서 언급한 사진을 통해 두 개념을 살펴보자. 1926년, 제임스 반 데르 지가 찍은 미국의 한 흑인 가족사진에서의 스투디움은 꽤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들은 형식과 격식을 차리고, 복장을 갖춰 입었다. 사진작가는 이를 통해 사진 속 인물들이 사회적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 백인 모습으로 치장한 것임을 알리고자 한다. 하지만 바르트는 이 사진이 흥미를 끌긴 하지만, 자신을 ‘찌르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그를 찌르는 것은 사진에서 아주 세부적인 요소, 예컨대 여자의 넓은 허리띠, 뒷짐 진 여자의 팔, 끈 달린 여자의 구두였다. 이것이 바로 바르트가 과거의 흑인 유모를 떠오르면서 느낀 푼크툼이 된다.  

스투디움과 푼크툼. 마침내 사진 읽기는 비로소 온전히 이루어진다. 이렇게 두 관계가 수평적으로 공존했을 때, 우리는 사진의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 스투디움은 사진을 이해하는 데 밑바탕이요, 여기에 푼크툼이 이행될 때 나만의 새로운 의미가 창출되는 것이다. 물론 불분명하고 명확하지 않은 푼크툼이라는 개념 때문에 바르트의 사진론은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문학 이론가 데릭 애트리지 (Derek Attridge)에 의하면 바르트가 사진 속에서 이미지의 세부요소에 대해 푼크툼이 존재한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확인시킨다면, 그 세부요소들은 푼크툼의 질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약속된 기호들, 즉 스투디움이 돼버린다. 때문에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아예 푼크툼을 버리자는 학자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푼크툼을 버리기엔 너무나 아쉬운 개념이다. 『교수대 위의 까치』에서 푼크툼의 중요성을 역설한 진중권 씨는 “작품과 관객 사이에 스투디움만 끼워 넣을 경우, 이 표준적 해석의 필터가 외려 작품에 대한 생산적 독해를 가로막을 수 있다”며 “따라서 관객이 작품에 대해 자신만의 고독하고 개별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때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작품에 대한 일반적 해석을 넘어서는 직관을 제공해줄 때, 관객은 스투디움을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푼크툼을 발견해 새로운 의미를 누릴 것이다. 당신 앞에 놓여있는 하나의 사진, 당신은 지금 푼크툼이 느껴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