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국악드라마 '제주선비 장한철 표류기' 리뷰

기자명 엄보람 기자 (maneky20@skkuw.com)

국악, 젊음의 소리가 되다
이미 한국에 뿌리를 내렸거나 한국적 토양에서 나온 음악, 국악. 그 자체로서 우리네 삶을 보듬어왔지만 어렵다거나 지루하다는 억울한 누명을 받아왔다. 그러나 국악에도 새 바람이 불고 있다. 국악의 가치를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 국악인들의 활동이 바로 그것. 국악의 빛나는 내일을 채워보자.

종종 문자가 제 에너지를 감당치 못하는 경우가 있다. ‘뮤지컬’이 바로 그런 단어가 아닐까. 1초도 길다는 듯 바쁘게 색을 바꾸는 조명. 온 열정을 발산하는 무대 위 몸짓. 뮤지컬의 화수분 같은 매력은 그 화려한 볼거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럴 땐 눈이 예닐곱 개쯤 됐으면 싶지만 청개구리 심보로 눈을 살짝 감아 본다면 어떤가. 참는 것도 잠시 눈앞의 공연에 대한 호기심이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려버린다. 그런 뜻에서 이 별난 뮤지컬은 참 야속하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토라진 척 등을 돌리려니 이거 또 은근히 재미 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관객에게 신명 난 장구 소리가 으름장을 놓는다. “눈은 됐으니 두 쪽 귀나 내놓으시오”하고.

기록유산 <장한철의 표해록>을 원작으로 한 이 라디오 국악뮤지컬은 한양으로 과거 길에 오른 제주 선비가 25일간 바다 위에서 겪는 우여곡절을 담았다. 성난 파도를 따라 뱃전을 구르고 왜구들 손에 거꾸로 나무에 매달리는 수모가 끝도 없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죽을 고비와 그 속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의 이야기는 온전히 ‘소리’로만 관객에게 전해진다.

두 귀는 망망대해 저편에 던져두고 나머지는 이 세상에 남겨 놓는 기분. 참으로 묘하다. 돛은 비바람에 미친 듯 춤을 추고 머리 위로 곧 바닷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데 이 모든 것이 귀로만 들리니 애간장이 다 녹는다. 시각이란 놈이 놀고 있다고 해서 몰입도가 떨어지리란 생각은 오산이다. 주르르 풀어내다가 별안간 휙 잡아채는 판소리 자락은 듣는 이를 속수무책으로 쥐고 흔든다.

소리꾼의 목소리가 웃었다, 울었다, 찡그렸다 할 때마다 얼굴은 제멋대로 씰룩이며 주인을 저버리기 일쑤다. 구수하니 신명 나는 대사들은 방심하고 있던 뇌 깊숙이 교훈을 박아 넣는다. 구성지고 애처로운 맛으로 마음 가닥을 건드리는 여창도 얼쑤 좋고 가슴을 뚫을 듯 시원하게 내지르는 남창도 절쑤 좋다. 여기에 개성 넘치는 피아노 선율과 실감 나는 컴퓨터 음향이 세련미를 더하니 이야말로 좋지 아니한가.

한바탕 소란을 다 듣고 나니 뱃멀미가 난다. 웅크렸다 펴내고 몰아가다 뚝 그치는 옛 장단이 젊은 마음을 통째로 들었다 놨다 한 탓이다. 다가오는 한가위, 소리로 엮어 만든 이야기 한 필 선물로 건네 본다. 눈을 감아야 보이는 바다빛깔 비단. 씨실은 판소리 자락이요, 날실은 우리네 풍성한 악기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