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극 <로미오와 줄리엣> 리뷰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로미오와 줄리엣. 서양에서 탄생한 이 이야기는 세상 널리 전해지며 사람들에게 슬프고 안타까운 사랑을 들려줬다. 그간 희곡에서 영화로, 또 뮤지컬로 모습을 바꿔가며 세계를 울린 이 이야기는 마침내 창극에도 자리를 잡았다. 언뜻 보기에 어울리지 않는 작품과 형식의 만남. 중세 귀족들의 이야기가 창 속에서는 어떻게 전해질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창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나기 위해 찾은 곳은 공연예술박물관 아카이브실이었다. 국립창극단에서 공연했던 창극을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녹화된 영상이었기에 배우들의 호흡 하나하나를 직접 느낄 순 없었지만, 집중하는 사이 어느새 스크린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스크린 속 새로운 세상, 그곳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은 로묘와 주리로 살아가고 있었다. 원작에서처럼 대대로 원수지간이던 두 집안은 만날 때마다 다투는데 그 모양새에서 창극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그들은 서로를 자기 집안보다 천하다고 욕한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음색에 구수한 사투리가 담겨 창으로 내뱉어지니 비난이라고 느껴지기보단 맛깔스러울 뿐이다. 로묘와 주리가 만나 반하는 순간도 신선하게 관객에게 전해진다. 그들의 마음은 꺾이고 흐르는 장단에 따라 서로에게 전해진다. 이 순간이 분명히 진지한 것에는 틀림없지만 창극은 이 분위기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로묘와 주리의 대사에 가득한 해학은 관객들을 웃음 짓게 한다. 진지한 사랑에 끼어든 웃음기가 분위기를 식힐 것이라는 걱정은 버리는 게 좋다. 우리네 삶의 희로애락을 담은 창에는 웃음도 있어야 어울리는 법. 적절한 웃음기를 머금다 보면 그 뒤에 따라오는 애절한 사랑은 더욱 간절하게 느껴진다.

익숙한 이야기를 따라 푹 빠져 들어가려던 순간에 창극은 또 다른 재미를 보여준다. 주리의 아버지가 주리를 강제로 시집보내는 날, 시집이라는 경사에 잔치가 벌어진다. 흥겨운 음악 속 모두가 덩실거리는 가운데 어찌 관객만 가만둘 수가 있겠는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대에 있던 배우들이 어느새 관객 옆으로 내려와 있다. 함께 춤추자며 관객들을 부추기니 흥에 취한 관객들은 자연스레 배우들을 따라나선다. 마침내 무대에서는 배우와 관객이 어우러진 춤판이 벌어진다. 무대에 나선 관객들은 춤을 추면서 관객석에 남아 있는 관객들은 그들을 보면서 그저 즐기면 된다. 관객이 즐기는 것 자체가 창극으로 다시 태어난다.

우리 모두가 아는 전개 끝에 결국 로묘와 주리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 그 한가운데 태어나 서로를 갈망했지만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슬픈 장면. 영화나 대형뮤지컬에 비하면 그 크기가 작은 공간에서 이뤄진다고 해서 그 감흥이 덜할 것이라 생각했다면 잘못이다. 구슬픈 창 속에 잔잔히 전해지는 그들의 사랑은 보는 사람을 눈물짓게 한다. 올라가고 내려가며 꺾이는 음색이 로묘와 주리의 삶과 사랑에 그대로 묻어나기 때문일까.

창극이 끝나고 그 속에서 빠져나오니 어느새 머릿속에는 중세 귀족 집안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나누던 사랑은 흐릿해지고 말았다. 대신 그 자리에는 두루마기를 거친 로묘와 저고리를 곱게 입은 주리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해주던 구성진 창만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