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주기 기념 추모문화제, 각양각색의 행사로 채워져

기자명 유정미 기자 (sky79091@skkuw.com)

불에 몸을 맡겨/지금 시커멓게 누워버린 청년은/결코 죽음으로/쫓겨간 것은 아니다.//잿더미 위에/그는 하나로 죽어 있었지만/어두움의 入口(입구)에, 깊고 깊은 파멸의/처음 쪽에, 그는 짐승처럼 그슬려 누워 있었지만/그의 입은 뭉개져서 말할 수 없었지만/그는 끝끝내 타버린 눈으로 볼 수도 없었지만/그때 다른 곳에서는/단 한 사람의 自由(자유)의 짓밟힘도 世界(세계)를 아프게 만드는,/더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의 뭉친 울림이/하나가 되어 벌판을 자꾸 흔들고만 있었다.//굳게굳게 들려오는 큰 발자국 소리,/세계의 생각을 뭉쳐오는 소리,…(후략)…
- 이성부 시, <전태일군>, (1970)

그는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각인되고 변용됐다. 책 『전태일 평전』과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뿐 아니라 △동화 △만화 △민중가요 △시 등으로 그에 대해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지속됐다. 그것은 그의 극적인 삶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는 1970년대 한국과 당시 비참하기 그지없었던 노동현실에 한 줄기 빛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그렇게 4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의 이름. 전. 태. 일. 이 세 글자를 어떻게 새기고 있을까.

오늘날 노동환경 성찰했던 추모문화제
지난 10월 30일, 시청광장에서 ‘전태일 40주기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2010 전태일의 꿈’이란 주제로 열린 이 행사는 전태일 열사의 40주기를 기념하는 추모문화제로,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가 주최했다.
시청광장에는 깃발이 나부꼈다. 깃발을 바람에 맡기고 투쟁을 외치며 연대를 목 놓아 부르는 사람들. 그들은 간절했다. 문화제가 무르익어 갈수록 시청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전태일을 새겼다. 이 행사에는 △민주노총 △진보신당 △참여연대 △한국진보연대뿐 아니라 △대학생 다함께 △대학생 사람연대 △전국학생행진 등의 다양한 대학생 단체들과 함께 우리 학교 ‘G20 반대 성균관대 운동본부’ 등이 참여해, 노동ㆍ시민사회단체에서 6천여 명이 모였다. 문화제가 열리기 직전에는 전국 비정규직 노동자 대회를 열어 전국의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철폐’와 ‘노동자 권리신장’을 주장했다.
이어 열린 문화제에서는 각계 인사의 추모 영상이 상영됐고,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발언이 이어졌다. 아들의 죽음 이후, 평생을 노동운동과 함께 해온 이소선 여사는 “이 땅 모두는 기본권이 있다. 노동자들이 피땀 흘려 일하지 않았다면 이만큼의 발전도 없었을 것이다. 노동자가 주인인 나라에서 기본권마저 빼앗으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노동자들의 단결을 주장했다.
행사에 참여한 ‘대학생 사람연대’ 박정훈(부산대 정외04) 대표는 “IMF 외환위기가 발생했던 97년 체제 이후 10년 속에서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도 생겨났다”며 “이와 관련해 최근 20대들은 전태일과 한국의 노동환경을 관찰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에서 벗어나 우리 세대가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것에 대해 성찰해봐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
이어 문화제는 노래패 ‘꽃다지’의 공연을 비롯한 연극, 춤, 음악 공연 등으로 진행됐다. 또한 이들 행사가 끝난 이후에는 인디밴드들이 참가한 ‘독립음악난장’ 공연이 열렸고, 행사장 한편에는 오후 3시부터 전태일 캐릭터와 도서 전시, 특수고용노동자 사진전 등 다양한 부대행사가 진행됐다.
이외에도 지난 13일에는 청계천 버들다리를 ‘전태일 다리’로 개칭하는 ‘808 문화행동’의 일환으로 현판식이 열렸으며, 성남 마석 모란공원에 전태일 열사의 묘를 방문해 그의 열사정신을 기리기도 했다.
행사와 관련해 전태일 기념사업회의 박계현 사무총장은 “이 행사가 서울시의 시청광장 사용조례가 바뀐 이후에 처음으로 열린 정치적 행사였고, 포천시와 공동으로 행사를 진행하다 보니 원 규모보다 축소된 측면도 있었다”며 “특히 지금은 전태일과 그의 동지들이 일했던 자리를 이주노동자가 메운 상황인데, 40주기를 기념해 전태일의 더 낮은 곳으로 향하려는 정신을 함께 본받았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하지만 행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현재 구로공단에서 기계공으로 일하는 노동자라고 소개한 김유진 씨는 “여기 나온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이익과 밥벌이를 위해서만 나온 것 같다”며 “이 사람들이 진심으로 전태일을 기리고, 진짜 민주주의를 원해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나부끼는 깃발과 투쟁의 문구 속 전태일은 역사 속에만 머물러 있었다. 우리 학교 ‘G20 반대 성균관대 운동본부’ 태영(독문09) 본부장은 “이러한 지적에 무척 공감한다”면서 “신자유주의 물결과 비정규직 노동으로 인해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친 노동자들이 순수하게 전태일을 기릴 수 없는 이 상황이 우리의 현실”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얼마 전 한 노동자가 또 전태일이 걸었던 길을 따라 몸에 불을 지폈다. 그가 떠난 지 40년, 물론 노동환경은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사회는 또 다른 전태일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전태일은 오늘날 가슴이 뜨거웠던 청년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로, 그들의 자화상으로 새겨졌다. 민중가요 노래패 꽃다지는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그의 이름은 이미 고유명사를 넘은 그 무엇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모든 이가 전태일이라고 생각한다. 전태일이 세대 간의 벽을 허물고 세상을 바꾸고 싶은 우리를 연결해주는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에게 전태일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세상을 바꿔보라고 격려해주는 삶의 지표가 아닐까”

 사진│윤이삭 기자 hent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