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걷는 잡놈이라 불러 주시게
길 걷는 잡놈이라 불러 주시게
  • 엄보람 기자
  • 승인 2011.03.07 14:15
  • 호수 149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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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여행이라오. 디자인이기도 하고” 이보다 그를 온전히 표현해낼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여러 땅, 다양한 사람들을 거친 그의 여행은 그림으로, 소설로, 연극으로, 또 결국엔 디자인으로 기록되곤 한다. 그가 들려준 여행과 작품과 삶의 이야기들. 그 중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요히 가슴을 울리던 몇몇 말들은 끝내 ‘살아감’으로써 해결해야할 숙제로 남았다. 

엄보람 기자(이하:엄) 평생을 그려온 그림, 첫 발을 들여 놓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정수하 여행예술가(이하:정) 나는 그림이라고는 모르는 시골 마을 개구쟁이였어. 여덟 살 땐가 하루는 바닷가에 갔다가 어떤 소녀를 봤어. 그 애는 크레파스로 바다를 그리고 있었는데 그 색깔이 너무 신기한 거야. 내가 본 바다와 폐선들은 모두 무채색이었는데 그림 속엔 상상력이 가미된 화려한 색깔들이 있었거든. 난 왜 진짜 바다랑 그림의 색이 맞지 않느냐고 따지면서 크레파스를 눈밭에 집어던졌어. 근데 그 눈 속에 처박힌 크레파스를 보곤 봄 꽃망울이 연상되더라고. 군사정부의 회색 시대에 논산에서 태어나 줄곧 무채색, 국방색만 가득했던 나의 세상에 드디어 색이란 게 생겨나는 순간이었어. 그때부터 그림이라기 보단 색에 반해 벽이며 바닥이며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지.

엄 : 인생 전체가 여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끊임없이 떠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 : 8살 때부터 서울서 혼자 하숙을 시작했어. 어딜 가도 말리는 사람 하나 없다는 자유는 불행이면서 동시에 행복이더라고. 그 자유가 천착되고 습관화 돼버린 거지. 어떠한 목적의식 없이 걷는 길이 그냥 너무 좋았어. 돌아다니면 다닐수록 바깥세상이 너무 아름답고 소중하단 걸 알았지. 그 감정이 축적되고 그 축적이 관성화 될수록 또 다른 것을 자꾸 원하는 거야, 중독처럼. 온갖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고 그들의 사는 얘길 듣는다는 것 또한 멋진 일이지. 여행 도중 나무그늘에 앉아 하는 얘기들은 “다리 아프지?”, “너 밥 먹었냐?” 같은 본능적이고 단순한 것들뿐이야. 가식이 필요 없는 그런 만남이 그리워서 자꾸 떠나는 것 같기도 해.

엄 : 여행이 모든 작품으로 녹아드는 것 같은데


정 : 그럴 수밖에 없잖아. 내가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내가 만일 강이 보이는 아름다운 스튜디오에 앉아 디자인을 한다면 상당히 판타지적이고 관념적인 무언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어차피 이리저리로 돌아다니면서 모든 것을 얻었기 때문에 그 과정이 작품에 반영될 수밖에 없어. 여행 중엔 재료도 마땅치 않아서 급한 대로 간장이나 묵은 지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 이태리 카페에 앉아있다면 와인으로 그리고. 길 걷는 사람의 그림이라 가능한 일이야. 여행이나 할 것이지 뭣 하러 그림으로 남기느냐.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보면 그 보답으로 나도 뭘 주고 싶어져. 하지만 난 여행 중이고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그림뿐이지. 받은 만큼 주고 싶은 그 마음이 그림이 된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그려준 것들이 결혼식 초대장이며 치즈며 술로 돌아오기도 하고(웃음).

엄 : 작품의 제작 과정과 그 안에서 중요시 하는 것은 무엇인지 듣고 싶다
정 : 난 한 번도 목적을 가지고 작품을 시작한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냥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갑자기 주위 풍경이 다시 보이는 경우가 있어. 사람들은 주로 풍경을 보고 이젤을 펼치지만 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걸 좋아해. 그러다가 갑자기 창틀 모서리가 됐든 작은 꽃이 됐든 그리기 시작하는 거야. 가끔은 있는 그대로를, 또 가끔은 추상적으로 말이야. 인테리어를 예로 들어볼까? 누군가 내게 의뢰를 하면 일단 그 집에 들어가서 가족들을 관찰해. 그걸로 모자라면 붙들고 대화를 하고. 부인은 무슨 색을 좋아하나, 동선은 어떤가, 아이들은 어떤 놀이를 하고 노는지 등. 한참을 그 공간에서 지낼 사람들의 삶을 보고 들어야 겨우 구상이 생기기 시작해. 그 가족이 갖고 있는 시각과 취향과 역사. 그거야 말로 최고의 디자인이니까. 결국 ‘목적’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건 회화나 디자인이나 똑같은 것도 같네.

엄 : 회화와 디자인 뿐 아니라 소설, 연극,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정 : 솔직히 난 다 때려치우고 여행만 하고 싶어. 그렇지만 내가 그간 살면서 보고 느낀 것들, 그 모든 여행을 나 혼자만 즐기다가 안고 떠난다는 게 너무 안타깝더라고. 거대한 사명감은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활동 범주가 넓은 나는 생각도 총체적으로 하는 편이야.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싶어. 작품 장르가 다양한 건 기록과 전달에 가장 유리하고 어울리는 방법을 찾다 보니까 그랬던 거지. 좀 더 소박한 계기를 말해볼까. 난 너무 자유스럽게 살아왔어. 내가 나중에 어딘가에서 쓰러져 죽어도 내 아들들과 친척들, 친구, 후배들이 ‘수하 그 친구가 술만 먹고 다닌 건 아니었구나’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아마 예술가 모두가 그럴 거야. 창작을 부추기는 참 인간적인 이유지.

엄 : 앞으로의 계획이나 소망이 있다면
정 : 세계 고유의 시장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책을 한 권 더 내고 싶어. 사막의 낙타시장이나 암스테르담의 꽃시장 같은 곳 말이야. 그러다 ‘세계’라는 테마가 부담스러워질 때면 조선 팔도도 다시 한 번 걷고 싶고. 요즘엔 대학교에서 강연을 해보는 것도 내 꿈이 됐어. 그들에게 외국에서 바라본 한국을 말해주고 싶거든. 숲에서 나와야 나무가 보이니까. 민족주의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한국엔 상상 이상의 역사와 저력이 있어. 이걸 조심해라, 저걸 해라 하는 조상들의 말씀에 녹아든 안부, 배려, 정과 같은 것들. 이건 서양에서 중시하는 정보나 지식 보다 훨씬 강한 힘이 있어. 게다가 우린 축제의 민족이야. 잘 먹고 놀고 마시고 추는 한국 사람들은 세계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어디에서든 그 곳의 자연과 합일할 줄 아는 우리 고유의 기질은 한국을 떠나야 비로소 보여. 난 그걸 가르쳐주고 싶어.

엄 : 학우들에게 ‘20대에 꼭 해야 할 일’을 한 가지 제시해 줬으면 한다
정 : 멋지게 살지 않아서 해줄 말이 별로 없네. 일단 첫 번째는 사랑. 사랑을 하지 못하는 순간에 나는 자주 내가 무의미하다고 느꼈으니까. 그 다음엔 우정. 뻔한 소리 같지만 그 두 가지야 말로 진실 된 정열을 맛보게 해주지. 가장 중요한 건 그냥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사는 거지. 예쁘지, 얼마나 예뻐 이 젊음이. 내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것을 여러분들이 대신 즐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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