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BOX

기자명 엄보람 기자 (maneky20@skkuw.com)

유오상 기자 osyoo@skkuw.com
팔각기둥을 가로로 길게 늘여 눕혀 놓은 모양이라고 해야 할까. 전시관 하나를 몽땅 차지한 이 물건은 그 생김새를 형용하는 것부터 녹록치 않다. 전면은 검은 유리요 몸뚱이는 알루미늄 일색이니 “자유롭게 관람하세요”하는 친절한 말에도 선뜻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 안에 젊은 작가들의 예술혼이 고고히 빛나고 있다는 것을. △파리 △마드리드 △런던 △요코하마를 거쳐 지난 2월 마침내 서울, 아트선재센터에 상륙한 H BOX(에이치 박스, 이하 원문으로 표기)를 반갑게 맞이하자.
H BOX는 2007년 파리의 퐁피두센터에서 첫 선을 보였다. 젊은 비디오 아트 작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에르메스(Herme`s) 미술재단의 주문이 그 발단이었다. 그들은 세계를 순회하며 각국의 영상 예술 작품을 수집하고 전파해줄 도구를 원했고, 그 결과 분리와 운반이 용이한 2천6백 킬로그램짜리 상영 공간이 탄생했다. H BOX 디자인을 맡은 건축가 디디에 피우자 포스티노(Didier Fiuza faustino)는 자신의 작품을 ‘여행 키트 상영관’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여행자의 트렁크가방마냥 세상을 떠도는 H BOX는 매년 4편씩 새로운 작품을 추가로 담아왔다. 그 결과 현재까지 제작된 영상만도 자그마치 21편. 이번 내한 전시는 2009년 작품에 더해 2010년 제작된 4편을 처음 공개하는 자리다.
8편의 작품은 H BOX 내부에 설치된 스크린 위에서 끊임없이 연속 상영된다. 처음 발을 들여 놓은 H BOX는 중국인 작가의 단편 영화를 보여주는 중이었다. 연이어 높은 데서 내려다본 거리를 담은 짧은 영상, 예쁜 소녀들이 흰 공간을 무지막지하게 부수는 영상 등이 쉴 틈 없이 쏟아진다. 비디오 아트라는 이름의 각양각색의 작품들은 ‘난해하다’는 점을 빼곤 도무지 공통점도 없다. 여행을 떠난 가족의 승용차 위로 난데없이 미사일이 떨어지질 않나, 여우 가죽을 홀라당 벗기는 박제사의 손놀림을 모자이크 하나 없이 고스란히 보여주질 않나. 이쯤 되면 작품 이해를 포기한 몇몇 관객들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버린다.
분명 H BOX에는 언제까지 앉아 있어야 한다는 강제성이 없다. 시작과 끝이 없는 고리 형태의 상영 방식 덕분이거니와 출입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곳엔 사람을 붙잡아두는 묘한 재주가 있다. 고막에서 시작해 심장 근육 표면까지 진동시키는 음향효과, 외부로부터 단절되고 스크린만이 세상의 전부로 느껴지는 매력적인 착각. H BOX는 마치 작가가 막 완성한 따끈따끈한 영상 예술 작품을 변형 없이 순수하게 맞아들이는 기분을 선사한다. 여기에 ‘인간의 욕심’이 마지막 화룡점정을 맡는다. 다음 작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다음 작품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바로 그 욕심이야말로 수용자를 시나브로 작품 속에 매몰시킨다.
간신히 정신을 추슬러 새까만 안락 속을 기어 나오니 그제야 허리며 엉덩이가 쑤신다. 전시장에서 멀어지는 내내 그 맥락 없고 완벽했던 영상들의 순환 고리가 머리 주위를 돌고 돈다. 어쩌면 그것들은 애초에 ‘이해’를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친다. 완벽한 몰입. 그 자체가 H BOX라는 기묘한 발명품의 목적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