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축제(祝祭). 이름만으로도 몸 저 구석에서 무언가를 꿈틀거리게 만드는 단어이다. 계절의 여왕인 5월과 청춘의 꽃인 축제는 느낌만으로도 잘 어울린다. 그래서 대부분의 대학 축제가 5월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밋밋해지기 쉬운 상아탑 캠퍼스에 젊음의 뜨거운 열정들이 펄떡거리며 뿌리를 박는 곳, 그곳이 축제라는 이름의 땅일 것이다. 며칠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 땅에 있는 동안은 학업, 진로 등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정한 열락(悅樂)의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이 카타르시스의 힘은 젊음 앞에 놓인 고통과 좌절을 이기게 하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축제, 그 설레는 카타르시스의 기간이 오늘의 대학가에서 본질의 손상 없이 아직도 유효한지는 의문이다. 한 통계조사에 의하면 축제 참여 여부를 묻는 설문에 약 41%의 대학생들이 불참 의사를 나타냈다고 한다. 이유로는 첫째가 ‘취업 준비 및 시험공부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37.9%)’였다. 두 번째는 ‘축제에 흥미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24.1%)’, 세 번째는 ‘참여할만한 프로그램이 없어서(20.0%)’였다.
이 통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먼저 고민 없는 청춘이 어디 있을까마는 우리 대학생들의 어깨가 취업, 시험이라는 현실적 무게로 점점 더 많이 주저앉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피 끓는 젊음을 축제가 확 끌어들이지 못하고 어정쩡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두 번째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현실의 무게가 버거울수록 잠깐이나마 그것에서 벗어나는 탈출의 시간은 필수적이다. 탈출, 휴식, 난장(亂場). 무엇이라 이름 붙이든 그 시간, 그 공간 속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어울리고 부딪혀야 한다. 그래서 짓누름의 압박을 털어내고 새로운 충전의 시위를 당겨야 한다. 그런데 불참 계획인 사람의 비율이 41%에 육박한다니. 그것은 현 대학 축제의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많은 연예인, 더 많은 주막(酒幕)이 성공한 축제의 기준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닌지, 조금이라도 더 유명한 연예인의 섭외가 학교와 학생회의 능력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닌지,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폭넓은 시선으로 사회까지 계몽할 수 있는 성숙한 축제에는 너무 무신경한 게 아닌지. 땀과 시간을 투자하기보다는 돈으로 간단히 해결해 버리려는 물질적 타성에 젖은 것은 아닌지. 대학이라는 지성의 울타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한 번은 자성(自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런 가운데 일부 대학에서 환경문제와 연결시켜 몇 년째 진행하고 있는 축제 형태는 신선하고 감동적이다. 축제 기간 동안 씻어 사용할 수 있는 그릇을 배부, 일회용품 사용을 금지하기. 삼단 설거지 시스템을 설치하여 물 절약을 유도하기. 빈 그릇 운동을 펼쳐 쓰레기 없는 공간 만들기. 나아가 쓰레기 발생 모니터링을 통해 캠퍼스 문화 바꾸기로까지 확산시킨다니 정말 사회를 선도해야 하는 대학인으로서 가치 있는 행보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외국 유학생이나 다문화 가정의 학생들이 많은 학교에서는 자신들이 가진 장점을 최대로 활용, 세계의 문화를 선보이고 다문화 이해에 초점을 맞춰 축제를 벌이는 곳도 있다고 한다.
대학인의 축제는 남달라야 한다. 주인 의식을 잃어버리고 흥미 위주의 말초적 상업 공연에 잠깐 넋을 놓아 버리는 일회성 흥청거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좀 더 의식 있고, 좀 더 가치 지향적이고, 좀 더 생산적이어야 한다. 단순히 돈과 술의 향연이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즐거움 위에 이웃, 사회의 변화까지 유도해내는 견인차적인 것이어야 한다. 인생에 있어서나 학문에 있어서나 그 몫의 적격자는 대학인이다. 그래야 최고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품격이 살지 않겠는가. 다시 오지 않을 젊음의 시간 위에서 맘껏 유쾌하게 지성을 드러내는 멋드러진 축제의 한 판을 이 봄에는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