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서준우ㆍ엄보람ㆍ정재윤 기자 (webmaster@skkuw.com)

미술관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천장이 높은 흰 벽에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는 풍경이 떠오를 것이다. 물론 미술관에서는 큰 소리로 말을 해서도, 작품을 만져보아도 안 된다. 이렇게 대중과 멀어져 ‘소외된’ 미술을 다시 대중에게 되돌리려는 움직임이 있다. 미술관이라는 성벽을 깨고 나온 대중들의 미술, 바로 ‘공공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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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이란 문자 그대로 공공적인 성격을 띤 미술을 말한다. 작게는 우리가 공원에서 볼 수 있는 조각품이나 벽화에서부터 조너선 보로프스키(Johnathan Borofsky)의 ‘망치질하는 사람(Hammering Man)’과 같은 거대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공미술의 범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공공미술로 불리는 것들의 공통점은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된 장소에 설치, 전시돼 미술을 매개로 장소와 결합하거나 장소 그 자체가 예술적 의미를 갖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전통적 공공미술은 단순히 공공의 장소를 미술과 관련지어 대중과 만나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문화적, 때로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통의 장으로써 지역공동체와 관객의 직접적인 참여도 이끌어내고 있다.
공공미술은 그 개념이 세상의 빛을 보기 전에도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 시초는 선사시대의 동굴벽화에서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된 것이며 19세기에 국가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한 기념 동상이나 조형물 설치가 성행했던 것도 공공미술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공공미술’이라는 용어는 1967년 영국의 존 월렛이 그의 저서 『도시의 미술(art in the city)』에 그 개념을 공식화하면서 최초로 등장했다. 이후 미국에서 도시 미화의 목적으로 공공미술을 적극 활용하면서 공공미술의 본격적인 성장이 이뤄졌다. 이렇듯 공공미술은 ‘장소 속의 미술’에서 ‘장소로서의 미술’, ‘공익 속의 미술’ 등으로 의미를 넓히며 사회적 공간 창조로서의 예술로 점차 나아가고 있다.
공공미술은 머물고 싶은 사회와 공간을 만드는 일을 우선으로 한다. 공공미술의 가치는 크게 인간에게 주는 혜택의 측면, 도시에 부여하는 이익의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개인에게 공공 미술은 기능과 유희를 함께 제공한다. 직접 만져보고, 올라타 보고, 쉬어갈 수 있는 구조물이 늘 지나치는 일상의 공간 속에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관객에 제한이 없는 거리의 미술은 일상과 유리돼 있던 예술의 개념을 인간 생활 깊숙이 찔러 넣어 차별 없는 기회를 선사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도시의 생명력을 높인다는 점도 공공미술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거주 환경에 예술을 깃들이는 일은 지역민의 자부심을 높여 계속 그 곳에 거주하고 싶게 한다. 도시 재생의 중요한 요소인 ‘지속 가능한 발전’은 공공미술이 야기한 △인구 유입효과 △자연스런 내부 커뮤니티 형성 △지역에 대한 외부의 관심 △지역 정체성의 개발 등의 효과들로 충족된다. 실제로 국내외의 여러 낙후된 도시들이 공공미술의 혜택을 받아 재생되는 기적을 선보이며 그 가치를 입증하고 있다.
공공미술은 도시와 공간, 사회라는 문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 한계가 있다. 머물고 싶지 않은 공간에 설치된 미술품은 태생이 부인되는 격이기 때문이다. 큐레이터 박삼철 씨는 그의 저서 『왜 공공미술인가』에서 “공공미술은 예술을 예술로만 국한하는 시각과 예술 아닌 사회적 관점으로만 보는 시각 모두와 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중적인 정체성 사이에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공고히 굳혀나가는 것이 오늘날 공공미술 앞에 놓인 가장 큰 과제라 할 수 있다. 공공미술이 사람과 사람, 공간과 공간의 관계를 되살려준다는 새로운 믿음의 바람까지 불고 있는 현재, 그 힘과 파동에 대한 공급자와 수용자 모두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