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우물길 프로젝트> 대표 이진우 인터뷰

기자명 엄보람 기자 (maneky20@skkuw.com)

인천광역시 십정 1동은 자그마치 20년 동안 재개발 ‘예정’ 지역으로 방치됐다. 이 슬픈 도시에 살고 있던 한 화가는 마을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 사람을 모아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여러 고마운 이들의 붓질이 <열우물길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삭막한 마을 구석구석을 색으로 메워가는 동안 △독거노인들을 위해 고장 난 가전제품 등을 수리해주는 ‘마을 수리점’ △아이들과 미술프로그램을 함께 하는 ‘해님 공부방’ △온 동네 주민과 함께 한 ‘한가위맞이 마을잔치’ 등이 마을에 활기를 가져다줬다. 올해로 10년을 맞은 <열우물길 프로젝트>. 그 긴 시간을 지켜온 십정동의 화가 이진우 씨를 만났다.

지민섭 기자 jms2011@
십정동의 어느 협소한 순대국밥 집. 처음 마주한 이진우 씨는 한 무리의 풍물패를 몰고 가게로 들어섰다. “같이 수업한 친구들이에요. 밥 한 끼 하면서 얘기해도 괜찮겠죠?” 늘 펜과 종이만 가지런하던 인터뷰 테이블에 풋고추와 양념 종지가 하나 둘 놓이며 그와의 별난 오후가 시작됐다.
벽화와의 첫 인연을 회상하며 그는 ‘가는 패’라는 미술가 집단 얘기를 꺼내 놓았다. “전남 영광이나 경북 청송 같은 데로 농활을 다니는 모임이었어요. 시골 마을에 벽화도 그려주고 농민회가 요구하는 걸개그림이며 깃발을 그려줬는데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 길로 그가 벽화를 그려온 지 어언 20여 년 째. 좋아서 하느냐는 우문에 “누가 월급 주는 것도 아닌데 싫으면 어떻게 해요”라는 현답이 돌아왔다. “벽화란 게 그냥 내 미적 기호를 펼치는 게 아니라 주제로서 얘기하고 그것에 대한 반응을 듣는 그림이잖아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림으로 남기고 사람들의 생각을 듣는 그 소통의 과정이 난 좋아요”
이토록 벽화 사랑이 극진한 그가 십정동을 캔버스로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사는 곳이니까”라는 짤막한 대답 뒤로 잠시 무겁게 말을 고르는 시간이 이어졌다. “좀 이따 직접 가봐야 이해가 될 테지만 십정동은 독특한 동네에요. 이 마을은 일당제 건설 노동자가 많은 곳이었는데 아이엠에프 때 건설경기가 몰락해버리니 한 순간에 실업자 동네가 됐어요. 남자들은 그저 낮부터 술 마시고 울분을 토하는 게 전부고 생계를 책임지는 여자들의 힘겨운 불평이 이어지다 보니 가정들이 하나 둘 파하게 되더라고요. 인근 재개발된 동네에 대형 할인매장이며 병원들이 생기면서 구멍가게랑 약국들도 다 망하거나 이사가버리고 동네 기본구조까지 다 망가졌어요. 재개발 얘기가 나오면 마을은 급격히 피폐해져요. 20년 째 얘기만 떠돌고 있는데도 재개발 할 거라며 망가져도 고치질 않고 방치하니까요” 이진우 씨는 마을 주민으로서 뭉근한 참담함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러던 중 그는 화가가 할 수 있는 건 붓으로 하는 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벽화 그릴 사람들은 온라인 카페로 끌어 모으고 성당, 교회, 부녀회 할 것 없이 찾아다니며 돈을 구했어요. 그렇게 열우물길 프로젝트를 시작한 게 2002년도니까 이제 10년 됐네요”
지민섭 기자

야심차게 시작한 열우물길 프로젝트지만 초반부터 예상외의 반대에 부딪치고 말았다. “거의 대부분은 환영해주는 분위기였지만 부정적인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재개발 한다는데 니들이 뭔 짓이냐, 재개발 막으려는 불순세력 아니냐는 극단적인 오해도 받았어요. 언젠가는 재개발 될 텐데 뭐 하러 사서 고생 하냔 식의 반응이 많았죠. 이해해요. 이 동네 살다보면 행복을 뺏겨간다는 기분이나 몰락의 느낌들 때문에 절로 냉소적으로 변하거든요” 분위기가 가라앉아갈 때쯤 때맞춰 훈김이 오르는 국밥 세 그릇이 도착했다. “먹고 하죠”하며 싱긋이 웃은 화가는 금세 한 사발을 뚝딱 비워냈다.
뜨끈한 국물로 배를 든든히 채운 후 본격적으로 십정동을 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우산을 든 이진우 씨가 앞장을 섰다. 모세혈관처럼 뻗은 골목길은 아침부터 내린 가을비에 젖어 미끄러웠다. 그 사이를 제 집처럼 누비는 그를 정신없이 따라잡다 보니 어느새 색색의 동화적인 벽화들이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려왔다. “여기가 열우물길을 처음 시작한 곳이에요. 맞은편 저기는 예전 슈퍼자리라 아주 예스런 가겟방 분위기로 그려봤고요” 처마에 매달린 듯 그려진 메주며 말린 생선, 푸근한 장독대, 그 옆에는 나이든 물감 고양이 한 마리도 나른히 늘어져 있었다. 보기 싫게 늘어진 녹색 호스를 마치 호박넝쿨처럼 보이게 그린 낮은 이층집, 사슴과 얼룩말의 눈망울이 인상적인 고갯길, 평범하게 시멘트로 바른 화단에 돌담처럼 무늬를 넣은 마당 등 걸음을 내딛는 양 편으로는 끊임없이 정겨운 풍광들이 이방인을 반겼다. 바람개비가 가득 그려진 계단을 막 오르려고 할 때 옆 건물의 열린 창문으로 할아버지 한 분이 고개를 내미셨다. 이진우 씨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임흥교(84) 할아버지는 마을의 벽화에 대해 묻자 유쾌하게 웃으며 연방 “좋지, 좋다구요!”를 외쳤다. “내가 꽃도 좋아하고 그림도 좋아한다구. 그러니 좋구말구지. 이 선생 우리 집 여기도 그림 하나 더 그려주라”
임 할아버지의 집 앞을 지나며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나 더 얻어들었다. “우리 벽화가 아니더라도 자진해서 자기 집을 칠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상대적으로 우중충해보이니까 가꾸고 싶은 마음이 생기나봐요”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서툰 손길로 페인트칠을 한 흔적이 곳곳에 기특하게 남아있었다. “난 계단 작업에 제일 애착이 가요. 계속 보수하고 다듬어야 해서 손이 많이 가지만 오르는 사람들을 덜 지치게 해주잖아요. 회색 시멘트길을 터덜터덜 올라가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니까” 물이끼가 미끄러운 가파른 계단을 잘도 오르내리는 그를 따라 크로버 길, 피아노길, 옥수수 길들을 한바탕 훑고 나니 숨이 절로 하늘에 닿았다. 지나치며 본 열우물길 프로젝트의 메인 벽화, 쓰레기장을 가꿔 만든 무 텃밭, 무지개 색 우산으로 덮개를
씌워뒀던 오래된 우물까지. 마을 구석구석의 애정 어린 피조물들은 머릿속을 형형색색으로 어지럽게 물들이기 충분했다. 이진우 씨를 도와 열우물길 프로젝트를 움직여온 희망근로자 루시퍼(34) 씨는 벽화가 마을에 가져온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줬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라 도움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삶의 울타리를 침해받는다고 느꼈나 봐요. 하지만 벽화로 자연스레 교류하면서 마을 외관 뿐 아니라 사람도 피폐함을 벗어가더라고요. 이제는 문화 예술적 혜택을 받는 것을 의심 없이 반기는 분위기에요”  
마을을 한 바퀴 돈 후에도 아직 못다 한 얘기가 많아 이진우 씨의 다락방 사무실까지 좇아 올라갔다. 국밥집에서 시작한 질문에 이어 정부 위주의 공모 프로젝트의 한계를 묻자 그는 지속적인 미술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모는 일회성이 짙어요. 올해 했던 곳을 내년에 또 손본다고 하면 거부당하지요. 한 번 혜택 받은 곳을 왜 또 하냐는 거예요. 한 번 손이 닿은 동네는 문화적 관리를 계속 받아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는 개인의 자발적인 참여로 시작하는 공공미술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지금까지 많은 정권들이 마을 미술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여러 공공미술 작업을 벌여왔어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문화를 만들고 누려야 하는데 정부와 관에 기대는 거죠. 세금이 문화 혜택으로 돌아온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지극히 옳은 일이지만 사회가 잘못 풀리고 있다는
우려 섞인 생각도 들어요” 공공미술을 정부가 틀어쥐고 하는 데는 우리나라 밖에 없을 거라며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마을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기는 내내 ‘미술이 그 동네 사람들이랑 같이 사는 것, 미술조차도 이웃이 되는 마을을 만드는 것’이 제일 큰 소원이라던 그의 힘찬 대답이 귓전을 맴돌았다. 십정동을 다시금 환하게 밝힌 것은 색색의 물감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 빛나게 만드는 그의 생각일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이른 오후 햇살이 어린 무수한 지붕들에 작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