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장수마을 재개발지 선정 뒤 침체… 뜻있는 단체와 주민 대안개발 나서

기자명 양명지 기자 (ymj1657@skkuw.com)

권정현 기자 kwon@
성북구 삼선동에 위치한 장수마을은 서울성곽과 삼선공원이 위아래로 있는 아름다운 동네다. 마을 곳곳의 담벼락과 계단 등에 그려진 벽화로 유명하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이 마을이 주목 받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됐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개발이 지연됐고, 그 사이 마을 주민들과 뜻있는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지금은 성공적인 대안개발의 사례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

녹록지 않은 삶, 그곳에 닥친 위기
삼선 4구역,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곳의 이름은 ‘장수마을’이다. 고령층이 많은 동네 특성상, 또 앞으로도 주민들 모두가 장수하자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실제로 노인가구가 55%이고 25년 이상 이곳에 거주한 토박이들이 대부분이다. 지역 주민의 40% 정도는 월 소득 1백만 원 이하의 사회·경제적 취약층이고 주택도 노후화가 심각하다. 더군다나 이곳 토지의 반 이상이 국공유지이고 전후 가난한 이들이 움막이나 판잣집을 지으면서 생긴 건물들은 대개 무허가주택이어서 거주자 중 상당수는 토지사용료를 체납하고 있는 상황이다. 균열이나 누수가 많은 것은 물론이고 도시가스도 들어오지 않아 겨울이면 냉방에서 생활하는 노인들이 많다고 한다.

권정현 기자

서울에서도 재개발 사업이 가장 활발한 성북구. 이 마을 역시 지난 2004년 도시주거환경정비계획의 일환으로 재개발 예정 구역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개발이 이뤄지지 않았다. 인근의 서울성곽과 삼군부총무당 같은 역사 유적 때문에 건물을 높게 지을 수 없었고, 북쪽을 바라보고 급경사를 이루는 지형적 여건 등 제약 요인이 많아 건설사들조차도 개발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개발 예정지로 지정된 곳이 통상 그러하듯 이곳도 높은 시공비를 들여 아파트를 지어 놓으면 본래 이곳에 살던 이들이 아닌 돈 있는 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할 것이 뻔했다. 재개발 예정지로 정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투자 목적의 외부인들이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마을을 떠나는 주민들도 많아졌다. 이 과정에서 80%가 넘는 집들이 원주민이 아닌 외지 사람의 소유가 됐다. 자연히 마을 주민 간 유대나 공동체 의식도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몇몇 뜻있는 이들이 마을을 살려 보고자 모였다. 녹색연합 산하의 △녹색사회연구소 △성북주거복지센터 △성북청년센터 △주거권운동네트워크 △한국도시연구소 등 7개 단체가 ‘대안개발연구모임(이하 대안모임)’이라는 이름 아래 대안개발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들은 평소 주거 환경과 좋은 마을 만들기에 대해 고민하며 대안적 도시계획을 실현할 곳을 찾고 있었다. 이들이 가장 중시한 선정 기준은 ‘계속 그곳에 거주하기를 희망하는 주민이 얼마나 많은가’였다. 또 한 가지 조건은 개발 수익성이 거의 없는 지역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수마을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켰다. 더불어 삼선 4구역의 집들은 근대도시의 서민주택이 형성돼 온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문화재와도 접해 있으니 근대 역사·문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대안모임은 이곳이 시·구청 차원의 경관 사업 조성에도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2008년, 대안모임은 본격적인 개선사업에 착수하기 전 꼼꼼한 조사와 주민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구역 현황조사와 주민워크숍을 통한 정비 방향 수립은 물론 전문가 자문을 구해 마을에 적용 가능한 제도 및 방안을 확인했다. 이렇게 마련된 계획에 따라 그 해 6월 이들은 ‘정든 이웃과 함께 계속해서 살 수 있는 장수마을 만들기’를 목표로 주민참여형 주거환경 개선사업에 돌입했다.
김원식 기자 wonsik0525@

조금 ‘다른’ 개발, 마을도 주민도 달라져
사업의 주요 내용은 △국공유지 처분 △기반 시설 정비 △주거 안정을 위한 주택 개·보수 △주민 역량 강화와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활동 등이다. 큰 계획에 따라 집을 수리하고 마을 주민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벽화를 그리는 등 미관도 조성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주민들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활발히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활동이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주민과의 소통을 통해 도시에서도 공동체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선사업에 대한 주민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을 뿐 아니라 주민 간 유대감도 더 강화됐다. 부녀회나 노인회 등 주민조직이 전혀 없던 마을에 주민협의회가 구성됐고 마을 소식지가 발행되며 △골목 디자인 교실 △마을학교 △바자회 △마을기업 등이 운영되고 있다. 요즘처럼 이웃 간에 얼굴 맞댈 일 없는 현실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현재 대안모임은 빈집 수리에 열중이다. 대안모임 박학룡 대표는 “전체 1백 50가구 중 15가구가 빈집으로 파악돼 일부를 직접 고치고 있다”며 “빈집은 마을의 노후화와 치안을 위협하는 요소라 할 수 있는데 이를 고쳐 내년 초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대학생 (저렴)임대 주택 정책의 일환으로 제공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개선사업에는 어려움도 많다. 우선 대부분 외부인인 가옥주와 연락이 두절돼 집을 수리하거나 이사를 하고 싶어도 손 놓고 있어야 할 때가 가장 힘들다. 지속가능성이 떨어진다는 점도 문제다. 몇 년째 냉방에서 겨울을 나고 계신 할머니와 무료 도배장판 시공사를 연계해 집을 고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곰팡이가 슬고 집이 피폐해졌다고 한다. 단열이나 누수 같은 근본적 해결책이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박 대표는 “수혜자 수가 적더라도 제대로 돕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더 좋다”며 “이를 위해서는 재정적·행정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전했다.

근본적·주체적 변화가 숙제

김원식 기자

대안개발에도 한계점이 있다. 장수마을의 경우도 그 시작이 주민 스스로의 노력이 아닌 외부 단체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외부의 지원이 많아지면 그만큼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려는 힘이 약해지게 마련이다. 아직까지 대안모임이 구심점이 되고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주민협의회가 사업을 주도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관련 전문가와 민간단체는 보조할 뿐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주민참여 방법을 적용해 보고 주민협의회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관(官)의 도움도 필요하다. 장수마을의 물리적 여건과 제도적 제약, 주민들의 현실을 감안하면 공공의 적극적 지원 없이는 주거환경 개선이 쉽지 않다. 민간에 의해 대안개발계획의 방향이 제시되고 실제 사업 추진 과정에서는 민관이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단순히 도로, 주택 같은 물리적 주거환경 개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사회·경제적 여건도 개선할 수 있는 사회적 재정비가 수반돼야 한다.
‘싹 쓸릴’ 뻔했던 장수마을은 대안모임과 주민들의 자구 노력으로 위기를 면했다. 사라져 가는 공동체의 힘을 되살려 보인 것이다. 물론 국공유지 토지사용 문제를 놓고 서울시와 의견 조정에 실패할 경우 장수마을의 이 실험은 미제로 남겨질 수 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함께 고민하는 시간과 주체적으로 문제를 풀어 가는 과정이 쌓이고 도움의 손길까지 더해진다면 다음 가을에도, 그다음 가을들에도 이 따뜻한 마을을 계속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