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일(영문06)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조선시대 ‘대원군(大院君)’이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은 총 4인이었으니,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 -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아들이었던 하성군(河城君) - 능양군(綾陽君) - 덕완군(德完君) - 익성군(翼成君)이 각각 선조(宣祖) - 인조(仁祖) - 철종(哲宗) - 고종(高宗)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대원군에 봉해지게 되었다. 이들 중 살아생전 대원군 칭호를 받아 권세를 누린 사람은 흥선대원군밖에 없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들 중 왕으로까지 추존(追尊)된 유일한 대원군은? 바로 정원대원군이다.
그렇다면 세자 자리에 오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왕으로 추존된 단 하나의 인물은? 역시 정원대원군이다. 조선 500년 역사상 대원군을, 그리고 세자가 아니었던 사람을 사후 왕으로까지 추존한 유일한 사례이며, 그 유일무이함으로 인해 당시 왕으로 추존되기까지 시끄러운 다툼이 있었음은 당연했다.
사실 임금의 아버지를 추존왕(追尊王)으로 봉한 것은 이미 전례가 있는 일이었으니 성종(成宗)의 아버지 의경세자(懿敬世子), 즉 덕종(德宗)의 경우가 그러했다. 하지만 덕종은 살아있을 때 세자 자리에까지 올랐기 때문에, 훗날 왕으로 추존되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정원대원군은 생전에 세자 자리에 올랐던 적이 없었으므로, 세자였던 적도 없는 인물을 추존왕으로 봉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왕실은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해 수도 한양(漢陽)을 버리고 공주(公州)에까지 피신했을 정도로 그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인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는 세력 또한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었으니, 인조로서는 도저히 두 발 뻗고 잘 상황이 못 되었다. 따라서 인조는 어떻게든 자신의 아버지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함으로써, 왕실의 위신도 세우고 자신의 정통성 또한 마련하여 당시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임금의 움직임에 서인(西人), 특히 최명길(崔鳴吉), 이귀(李貴) 등의 공서(功西) 세력이 동조하게 되었는데, 이들로서는 자신들이 옹립한 왕 인조의 위신을 세워주는 것이 곧 자기 세력의 기득권 또한 공고하게 하는 것이었기에 인조의 바람을 실현시키는 데 적극 힘을 보탰다.
그러나 인조는 곧 강력한 반발을 맞이하게 된다. 세자도 아니었던 사람을 왕으로 추존하는 것은 분명 예법상 문제 있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전례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론삼사(言論三司)든 유생이든 곳곳에서 극렬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으며, 심지어는 서인들 상당수도 이러한 임금의 무리한 작업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허목(許穆)을 중심으로 한 성균관 유생들의 반대가 심했는데, 이들은 왕의 의지를 꺾기 위해 박지계(朴知誡) 등의 추존 찬성 인물들을 유생의 명부에서 삭제하고 수업을 거부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유생들의 반발이 거셌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허목 등 추존 반대 운동을 주도한 유생들의 과거 응시권을 박탈하는 ?정거(停擧)?로 강경하게 맞섰으며, 공서(功西) 세력의 도움을 얻어가면서 드디어 1632년 정원대원군을 원종으로 봉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후 조선은 3명의 추존왕-진종(眞宗), 장조(莊祖), 익종(翼宗)을 더 맞이하게 되지만, 원종처럼 세자도 아니었던 인물이 왕으로 추존된 사례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