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지만 ‘여성’이 아닌 나를 해명하는 일에 집중합니다.이따금 망설였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별것 없는 글일 뿐인데, 비워 둔 문장 틈새에서 혹 미약하고 부족한 사유가 들키지는 않을까 여전히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변명의 자리를 마련해 주셨으니 덧붙입니다. 앞으로 더 깊이 공부하고 더 많이 고민하고 더 크게 변화할 테니 부디 너른 양해 부탁드린다고요.어리고 우스운 고백이지만, 여자와 나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일은, 어쩌면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인 것 같습니다. 저를 설명하려면 우선 제가 어떤 여자인지부터 정의해야
“마음에 털끝만한 의심도 없다면 무엇이든 다 이루어지리라.”한 절의 스님이 어린아이에게 물에 젖어 거꾸로 엎어 놓은 옹기를 바로 놓으라고 한 다음 날, 그릇들은 모두 겉과 속이 뒤바뀐 채 뒤집혀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뒤집힐 리 없던 그릇의 겉과 속이 바뀔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아이의 털끝만한 의심도 없던 ‘순수함’이 가진 힘 덕분이었다는 이야기의 결말은 처음으로 이야기를 접했던 중학교 국어 수업 때부터 지금까지도 이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때 글 속의 아이 소운처럼 열렬한 순수함으로 가득 찬 하
언어화하지 못하는 마음들을 쌓아둔다. 세상의 문법으로는 도통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 하면 안 되는 일을 마주할 때가 특히 그렇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병적으로 무언가를 끄적였다. 이번 여름 자연과학캠퍼스를 가득 채운 나무들이 내뿜는 초록을 보고 ‘능금’을 썼다. 싱그러움에 매료되어 내 전부를 걸고 싶었다. 이 병적인 끄적임에 이름이 붙어 과분한 상을 받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하고 싶지 않을 때 시를 쓴다’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글쎄, 들키고 싶지는 않은데 누군가는 꼭 알아줬으면 하는 묘한 바람을 담아 모호한 글을 썼던
단편 는 마감을 두고 ‘완성한’ 저의 첫 번째 소설입니다. 또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첫 번째 글이기도 합니다. 소설 작법에 문외한이라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습작에 가까운 어설픈 글로 수상을 하게 되어 부끄럽습니다. 구성도, 밀도도, 두루 설익은 날 것의 글을 인내심 있게 읽어주시고 평가를 해주셨다니 송구스러운 마음과 동시에 감사한 마음도 듭니다. ‘읽는 사람은 죽기 전에 천 번을 산다’는 말이 있지요. 저는 쓰면서도 다른 이의 삶을 경험합니다. 이번 글은 스스로 만들었지만 낯선 또 하나의 삶을 살아
극복할 수 없는 슬픔이란 언제나 쓰나미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들이닥칩니다. 애써 못 본 체하고 있던 저 먼 해원으로부터 까닭 없이 밀려 들어옵니다. 나를 덮치는 파도의 유속과 수온, 그리고 파고는 나조차도 가늠할 수 없을 지경이기에 오롯이 자신의 소유입니다. 어찌할 도리 없이 잠겨버린 나를 앓는 시간. 그 시간이 흘러 고요해진 물결이 다시금 바다로 빠져나갈 때, 이 썰물을 우리는 망각이라 부릅니다. 그럼에도 기어코 지면에 괴여있는 물웅덩이는 기억입니다. 오직 나만이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웅덩이의 깊이는 그로 하여금 하염없는 높이
올레 사거리 앞에서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문득 택시가 내 앞을 아주 빠른 속도로 지나간 적이 있다. '하마터면 치일 뻔했다.' 작년 겨울 한동안 나는 지하철 타는 것을 힘들어했다. 사람들이 가득한 지하철의 내부가 가끔 큰 덩어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덩어리의 속을 파악하려 하면 그림자가 불쑥 나를 옥죄어 오고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슬픔을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이고 슬퍼했던 기억이 있다. 어떤 시기의 나를 위해 써야만 했던 글을 썼다. 베를린의 카페에서 마감일이 다가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설산의 장경
올해의 끝을 기다리며 지난봄 해월과 걷던 서촌을 떠올립니다. 문득 글을 쓰고 싶다는 내게, 지금은 헤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가고 싶은 길 위에 서 있다고. 그게 네게는 글인 것 같다는 말. 빈 화면을 마주하고 자기 의심이 피어오를 때면 해월이 건네준 따뜻함을 꺼내 매만지곤 합니다. 뜻밖의 연락을 받고 여러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많은 다정에 기대어 쓰고 있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두 손 모아 기도하게 됩니다. 고맙습니다.제 목소리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열어 주신 유희경 선생님, 언제나 응원
과분한 결과를 안게 되었다. 동시에 무거운 책무가 주어진 듯하다.소설을 잘 모른다. 시도 잘 모른다. 그래서 문학을 주제로 누군가와 마음껏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렵고, 죄송스럽다.다만 그저 창작을 좋아한다. 오직 나의 의지대로 바뀔 수 있는 세상을 좋아하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통제할 수 없는 그것이 나를 이끌게 되는 아이러니를 즐긴다.종일 글만을 고민하고 쓰던 때가 떠오르기도, 동시에 글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살던 때가 떠오르기도 한다.그럼에도 문학의 중요성을 환기해 준 사람들이 늘 있어 주어 감사하다.떠오르는 사람들.우리 가족 네 명
김혜순은 시를 쓸 때 자신은 기독교도도 아닌 불교도도 아닌 시교도라고 말한다. 모든 정체성이 벗어던진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에 낯선 나라의 독자들도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시를 읽을 때 모든 경계를 넘어 김혜순 시인과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영어도, 중국어도, 한국어도 아닌 그 어떤 명명할 수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변방에 있는 여자들끼리 만나 함께 웃고 춤을 추고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 속에서 뛰어다니는 꿈을 꿨다. 일어나 보니 시를 읽은 것이다. 제 글에 코멘트를 해주신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김혜순의 놀이에 대해 썼던 글
기계와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는 요즘, 문학만큼은 인간이 아닌 AI가 감히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학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을 작품으로써 뱉는, 인간만이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이며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제 글에 나온 주인공 ‘해수’의 대사이기도 하죠.그렇기에 저는 문학을 사랑합니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저는 그 불완전함 속에서 나오는 말들을 좋아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어울려 만나 느끼는 완전하지 않은 감정들과, 저마다의 삶은 사람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기 때문입
나의 파란 역사김하경(경영 18) 얼마 전 나는 눈앞에 버스 정류장을 입 안에 넣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아니 그보다도 그곳을 오가던 사람들의 앉은 자리들을 한 입에 삼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그러다 실수로 파란색 마을 버스를 같이 삼켜버렸다이것 참 잘못되었구나 싶어서 일단 잘근잘근 씹었다 푸른 단물이 나올 때까지 씹었다한때 나는 나도 모르게 바다를 삼킨 아이기를 은근히 바란 적이 있다그러나 푸른 단물이 나올 때쯤 나는 그대로 파란색 버스가 되었다이름은 5-3이었다모서리가 유달리 둥글고 몸체는 작은 그래서 종종 등원 버스로 착각되기도
능금차해원(자과계열 23) 초록아 어서 이리 와이리 와서 나를 죽여줘내 머리카락을 뜯어다 울창하고 빽빽한 뿌리를 만들어가장 우월한 유전자를 가져다 핏빛의 열매를 낳아줄래여름은 초록 너 하나의 계절 너 말고는 모두 다 질식해 죽어간다는 뜻이야 과포화 상태의 공기, 침수가 일어나는 장마에도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메말라 간다는 건거대한 찜기에서 보내는 95일보드랍고 촉촉하게 익어갈 사람, 새, 고양이, 버섯, 느티나무 같은 것을 떠올렸었어96일째 되는 날에야 손끝 첫 번째 마디를 구부려 가며 기어이 감각을 되살려 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