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규리 (vic_guri@naver.com)
1998년에 독일에서 발행한 브레히트 우표
1998년에 독일에서 발행한 브레히트 우표

 

무대 위에서 플래카드가 내려와 노래의 제목을 알려 주고, 곧 날카로운 재즈풍 리듬과 강한 악기의 음색 대조가 귀를 어지럽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관객은 어쩌면 작품이 산만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정확히 경험한 것이다.

혁신적인 연출 기법을 제시한 브레히트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회복하게 해


브레히트, 몰입을 거부하다
현대적인 연극 기법인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관객이 넋을 잃고 무대를 바라보는 경우를 가급적 피하려 한다. 기존의 연극이 논리적인 사건 전개를 중심으로 한다면 서사극은 짤막한 이야기 토막인 에피소드를 늘여놓은 구조다. 서사극은 몰입과 *카타르시스 같은 감정 상태를 지양해 이를 막기 위한 다양한 장치를 마련했다. 해설자를 등장시켜 줄거리를 설명하거나 배우가 대사를 읊는 중간에 노래를 부르는 등의 방법을 통해 몰입을 방해한다. 얼핏 들으면 서사극은 뮤지컬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뮤지컬이 음악을 애호하는 극이라면 서사극에서의 노래는 어디까지나 몰입을 막기 위한 장치다.

이와 같은 극을 제작한 것은 브레히트가 나치 시대를 경험한 동독의 지식인이기 때문이었다. 브레히트는 파시스트 정권이 국민의 비판 의식을 감정이입으로 마비시켰다고 생각했다. 나치의 선전물에서 보여주는 기술적으로 완벽한 연출로 인해 관객이 *파시즘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고 본 것이다. 그에 따라 선전극에 대항할 수 있는 연극의 필요성을 느꼈다.

비판 의식이 움트는 거리감
‘생소화 효과’는 서사극을 서사극답게 만드는 연출 기법이다. 이는 브레히트가 만들어 낸 신조어 ‘Verfremdungseffekt’를 한국 브레히트 학회에서 번역한 용어다. △낯설게 하기 △소격 효과 △소외시키기 등의 용어로 번역되기도 한다.

브레히트는 생소화 효과를 “그 사건이나 성격에서 △명백한 것 △알려진 것 △자명한 것을 떼어내 버리고 그것에 관해서 놀라움과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간단히 말해 생소화 효과는 몰입과 몰비판의 전염을 막는 일종의 정신적 거리두기라고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갑자기 해설자가 무대에 올라와 앞으로 전개될 내용과 결말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일종의 스포일러를 하는 셈이다. 숨 가쁘게 달려가는 이야기를 기대한 관객의 입장에서는 조금 진이 빠지는 전개가 될 수 있다. 대신에 관객은 극이 결말에 다다르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전개되는지에 집중하게 된다.

현대의 많은 작품에서 생소화 효과를 도입했다. 그 결과 오늘날의 관객이 생소화 효과가 적용된 공연을 관람하고서 새롭다는 감상을 얻기는 힘들다. 그러나 브레히트가 생소화 효과 연출을 도입했던 당대에는 관객에게 낯선 감각을 안겨줬다. 브레히트 이전의 연극은 관객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실제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환상무대를 표방했다. 연출가는 현실에 충실한 사실적인 환상을 자아내고자 다양한 소품과 효과를 동원했다.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은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햄릿>을 보며 가련한 오필리아의 죽음에 눈물짓기도 하고, <안티고네>를 보며 안티고네의 의로운 모습에 감화되기도 하며 인물에게 이입한다. 그에 반해 브레히트는 관객이 단순히 수동적으로 연극을 관람하는 처지가 되지 않길 바랐다. 관객이 거리를 두고서 무대를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생소화 효과는 소위 제4의 벽에 구멍을 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4의 벽은 무대와 객석 사이를 가르는 투명한 벽을 뜻한다. 물론 이 벽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배우는 관객이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들만의 세계에서 연기하고, 관객은 무대 위에 개입하지 않으며 조용히 배우의 모습을 지켜본다. 제4의 벽이 관객과 배우 사이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때 생소화 효과는 무대 위의 환상을 약화시키며 연극을 보고 있는 관객 자신을 자각하게 한다. 많은 작가가 제4의 벽을 깨기 위해 예술적인 시도를 했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페터 한트케의 <관객 모독> 역시 제4의 벽을 허문 대표적인 작품으로, 공연장에 들어선 관객은 배우에게서 욕설을 듣거나 차가운 물세례를 맞는다.

브레히트를 수용하려는 한국에서의 다양한 시도
우리나라에서도 극에 브레히트의 기법을 접목하려는 노력이 있다. 2015년 국립창극단이 무대에 올린 <코카서스의 백묵원>이 대표적이다.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그루지야를 배경으로 두 여인의 양육권 갈등을 다룬 브레히트의 작품이다. 창극은 가객이 연기하며 판소리 조로 노래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극으로, 브레히트 작품의 해설자와 창극의 *도창 요소에서 공통점을 확연히 파악할 수 있다. 국립창극단에서는 원작에서 노래로 처리하던 부분을 판소리로 재창작했다.

희곡 창작에서도 브레히트의 생소화 요소가 돋보이는 작품이 있다. 이강백의 <파수꾼>과 이근삼의 <원고지>가 대표적이다. 대중을 속이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권력자를 그려내는 우화인 <파수꾼>은 극이 시작할 때 해설자가 등장해서 작품의 공간적 배경과 이야기의 흐름을 미리 알려준다. 해설자 역할을 맡은 배우는 동시에 다른 배역을 맡는다. ‘짐꾼’이 되기도 하며, 마을 사람을 기만하는 ‘촌장’이 되기도 해 결과적으로 관객이 비판적인 거리를 가질 수 있게 만든다.

<원고지>에서는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 ‘장녀’와 ‘장남’이 등장해 가족과 집을 설명해준다. 관객에게 안내한 해설과 연극의 내용이 상충한다는 점에서 <원고지>의 해설자는 독특하다. 장남은 부모가 경제적인 책임을 다해 주기 때문에 그의 가족이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뒤이어 펼쳐지는 가족의 모습은 그의 설명과 다르다. 장남과 장녀는 계속해서 용돈을 요구하고 처는 남편인 교수에게 돈과 직결된 원고를 독촉하며 교수는 압박에 짓눌려간다. 이렇듯 반어적인 해설은 관객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다시 생각해보게끔 한다.
 

탁상공론에만 그친다는 비판 있지만
사회주의는 19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몰락했다. 더군다나 예술에서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는 요즘 브레히트의 기법이 창조 전선의 맨 앞에 서 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고전이 된 그의 작품을 두고 많은 한계가 지적된다. 한트케는 “브레히트가 관객의 환상을 깼을지는 몰라도 마르크스주의라는 새로운 환상을 끌어들여 관객의 눈을 흐렸다”고 비판했다.

작가 개인에 대한 비판도 소련 해체 이전부터 존재했다. 영국의 역사학자 폴 존슨은 저작 지식인의 두 얼굴에서 브레히트가 여성을 착취했다고 비판한다. 독일의 노벨문학상 작가인 귄터 그라스는 희곡 <노동자들이 반란을 예행연습하다>에서 아예 브레히트를 주인공으로 설정해 비판하고자 했다. 작중 브레히트는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 공연을 위해 반란 장면의 리허설을 진행한다. 동시에 극장 밖에서는 노동자가 실제 반란을 하려 결집해 있다. 이들은 브레히트에게 지지를 요청하지만, 그는 반란 장면을 재현하는 데에만 몰두한다. 그라스는 민중에게 탄핵당한 코리올라누스와 브레히트를 겹쳐 보이도록 묘사해 그의 논의가 탁상공론에 그치고 만다고 문학적으로 비판했다.

그렇지만 브레히트의 의미가 완전히 퇴색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제3세계의 연극인에게도 브레히트의 영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문화운동가 ‘아우구스토 보알’과 콜롬비아의 ‘엔리케 부에나벤투라’가 대표적이다. 보알은 <억압받는 자들의 시학>을 고안해 관객이 무대에 자유롭게 난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브레히트의 생소화 효과가 관객의 간접적인 참여에 불과하다는 성찰에서 비롯한 것이다. 엔리케 부에나벤투라는 칼리 실험극단을 창립해 ‘새로운 콜롬비아 연극’ 운동을 이끌었다. 대표작인 <병사들>은 바나나 농장에서 발생한 파업을 소재로 외국자본에 종속당한 콜롬비아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브레히트 이후의 시대에도 그가 남긴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연극이 계속되고 있다. 브레히트의 예술적 유산을 견지하고서 세계를 사유해보는 것은 어떨까.
 

*카타르시스=비극을 봄으로써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따위가 해소되고 마음이 정화되는 일.
*파시즘=국수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 반공적인 전체주의.
*도창=창극에서 연기자가 아닌 제삼자가 무대 뒤나 옆에서 극의 전개를 창으로 해설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