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최혜리 기자 (hyeeeeeli@gmail.com)

노동은 예술을 위한 필수조건
영상을 업으로 삼기까지,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다

 

2014년 영화계에 표준근로계약서가 도입된 이후 영화 현장의 근로환경은 상당 부분 개선됐다. 지금은 영화 제작을 노동이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고 영화 현장 스태프들의 노동권 보장 논의를 이끌어내기까지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영상업계 전반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일을 배우는 단계에 있으니’와 같은 이유로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일이 아직도 비일비재하다. 본지는 다양한 장르의 영상 현장에 종사했거나 종사하는 중인 20대 청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영상업계의 구조적 문제들을 짚어봤다.


학교에선 배울 수 없는 것 : 은영과 호산의 이야기
영상 현장에서 일하면서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고비는 밤샘 노동이 아니다. ‘영상 현장에 당도하는 것’ 자체가 고비다. 조은영(22) 학우는 우리 학교 컬처앤테크놀로지학과에 재학 중이다. 영상을 분석해본 적은 있으나 영상 현장에 관해선 배운 바 없다. 조 학우는 대학에 온 이후 아트디렉터라는 직업에 관심이 생겼다. 아트디렉터는 광고, 사진, 연극, 영화 등에 미술과 관련된 일을 감독하는 사람이다. 조 학우는 “당장 아트디렉터 일을 배우고 싶지만, 연고 없이 작업을 시작하기 어려워 현재로선 어떤 촬영 현장이라도 나가보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영상 촬영의 작업 과정은 현장에서 직접 일하며 배우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에 영상업계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는 현장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현장에서의 인연으로 다음 현장을 소개받는 것을 고려한다면 현장의 중요성은 배가 된다. 영화진흥위원회가 2020년 실시한 영화 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에서도 스태프의 채용경로를 묻는 문항에서 ‘관련 동료 또는 선후배를 통해’라는 답변이 54.8%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등 지인 중심으로 운영되는 영상업계의 특성이 드러난다. 지인 없이는 발을 들이기가 어려운, 불투명한 채용 구조라고 볼 수 있다.

김호산(24) 학우는 영상학과를 전공해 현재 뮤직비디오 프로덕션의 조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졸업작품까지 찍은 김 학우가 영상 현장에서 난처했던 점은 바로 계약서 작성이었다. 계약서 작성은 노동과 고용에 있어 핵심적인 부분임에도 대학에서 딱히 배운 적이 없었다. 김 학우는 “계약서뿐만 아니라 저작권, 최저 임금의 범위, 노동자로서의 권리 등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권리보장팀 송예진 주임은 “실제로 대학에 예술인 권익 보호 교육을 나가보면 예술 계약 체결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다”며 “예비예술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도록 대학 차원에서 예술인을 둘러싼 법과 제도, 환경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이 이뤄지면 좋겠다”고 전했다.

학교 밖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 : 예린의 이야기
황예린(가명·22) 씨는 미술과 영화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으로, 단편영화의 미술감독으로 영화 제작에 입문한 이후로 꾸준히 미술감독을 맡아왔다. 황 씨는 촬영팀과 조명팀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에 드라마 조명팀에 지원해 6개월가량을 근무했다. 하지만 드라마 현장은 일을 차근차근 가르쳐주기엔 지나치게 바쁜 곳이었다. 황 씨는 “조명팀은 촬영팀이 세팅을 완료하기에 앞서 모든 것을 끝내놓아야 한다”며 “휴식 시간이나 식사 시간도 반납하고 끊임없이 세팅을 이어 나가야 했다”고 말했다. 드라마 현장을 비롯해 영상 현장 전반에선 관찰을 통해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황 씨가 갔던 드라마 현장은 지난 영화 현장과 달리 팀장이 일괄적으로 임금을 지급했다. 드라마 현장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인 ‘턴키계약’ 때문이다. 턴키계약은 방송스태프 개개인과 근로계약을 맺는 대신 각 팀의 대표와 통계약을 맺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렇게 계약할 시 팀원은 각 팀의 대표가 전하는 급여만을 받게 된다.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 지부의 ‘2021년 드라마 제작 방송스태프 노동실태 긴급 점검 조사’에 따르면 근로계약서를 체결하고 일하는 방송스태프는 전체의 20%에 불과했다. 황 씨 역시 “지원되지 않는 교통비와 식대를 빼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보이지 않는다고 당연해지는 건 아닙니다 : 지윤의 이야기
이지윤(가명·25) 씨는 드라마 미술팀에서 일하고 있는 졸업생이다. 이 씨는 현재의 소속팀 이전에 뮤직비디오와 상업영화의 미술팀에서 각각 일한 적이 있다. 단기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상업영화를 제외하면 뮤직비디오와 드라마 미술팀에서는 모두 표준 근로 시간을 훌쩍 넘겨 일했고, 이는 지금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드라마 미술팀의 경우 촬영 시간 외에도 촬영 전 세팅 시간과 촬영 후 정리 시간이 필요한데 이 시간은 표준근로시간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 씨는 드라마 ‘킹덤’을 예로 들며 “킹덤의 미술팀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8년 1월 사망한 킹덤의 미술팀 스태프는 사망 전 이틀간 촬영이 없었다는 이유로 과로 사실을 인정받지 못했다.

뮤직비디오 미술팀은 더 열악했다. 새벽 퇴근이 일상인데다 부족한 인력에 따른 과도한 작업량, 실장의 폭언까지 따라와 금방 그만두게 됐다. 미술팀은 화면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담당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쉽게 놓칠 수 있는 부분들까지도 모두 신경 써서 준비해야 한다. 작은 소품부터 시작해 방 안의 가구와 벽지 등 미술팀이 해내야 하는 작업의 양과 디테일은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상업영화가 아닌 드라마나 뮤비에서의 미술팀은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이러한 작업량을 감당하려다 과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야기를 마치며
인터뷰에 참여한 이들은 본인이 겪는 영상 현장의 부조리를 인지하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 앞으로도 영상 현장에서 일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줬다. 김 학우는 “참여하는 모든 작품과 현장은 궁극적으로 내 작품을 만들기 위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연출을 맡고 있다 보니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장에서 스태프들과 함께 발로 뛸 때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노동임을 실감한다”고 덧붙였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박찬희 위원장은 “노동이 모여서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며 “스태프들의 노동권을 보장해야 좋은 작품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호산 학우가 영화 촬영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김호산 학우 제공
김호산 학우가 영화 촬영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김호산 학우 제공

 

우리 학교 영상학과 학우들의 영화 촬영 현장. ⓒ김호산 학우 제공
우리 학교 영상학과 학우들의 영화 촬영 현장.
사진|최혜리 기자 hyeeeee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