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전지빈 기자 (zibini930@skkuw.com)

인사캠 만남 - 박홍기(사회 82) 동문

기자에서 교수가 되기까지

도전으로 가득 찬 그의 삶

서울신문에서 30여 년 근무하고,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의 협회장을 거친 뒤, 지금은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미디어와 윤리를 가르치고 있는 박홍기(사회 82) 동문은 일생을 언론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건의 중심에서 세상을 보도하던 기자부터 학생들에게 언론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기까지 박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조용하고 영화를 좋아하던 소년
“어릴 때는 눈에 띄지 않고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누구보다 세상의 일을 보도하는 데 앞장서는 언론인이었던 박 동문의 과거는 의외였다. 박 동문의 몇 없는 취미는 그림 그리기와 영화 시청이었다.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면 학교 복도에 자주 걸렸어요. 또 TV에서 보고 싶었던 영화를 하는 날이라면 시험 전날이어도 챙겨봤죠.” 특히 영화는 그에게 시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 존재였다. 영화를 통해 다양한 세상을 경험한 박 동문은 기자가 돼서도 영화의 도움을 받았다. “기자 생활 중 여러 사건을 객관적으로 다루다 보면 감정이 무뎌지기 쉬운데 영화가 제 감성을 채워줬던 것 같아요.”
 

환경의 제약 속에서도 꿈을 키워나가다
대학이라는 열린 사회에 대한 기대와 함께 사회학과로 입학했지만, 박 동문의 대학 생활은 다사다난했다. 박 동문은 민주화 운동과 학생 운동으로 다소 혼란스러웠던 캠퍼스를 회상했다. “고등학교는 생활에 대한 규제가 엄격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기대했지만, 폐쇄적인 분위기가 계속됐죠. 캠퍼스에 경찰이 상주하거나 학교 가는 길에 최루탄 연기가 깔린 것이 일상이었어요.”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대학 생활을 이어갔던 박 동문은 지금의 학생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각자 시대에 맞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전 지금의 학생들이 부러워요. 자신이 세상을 알기 위해 노력한 만큼 알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잖아요.”

시대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학업을 향한 박 동문의 열정은 계속됐다. 박 동문은 군에 입대한 후 진로에 대해 깊은 고민을 시작했다. “대학에 입학할 땐 공무원을 하려고 했지만, 대학에서 다양한 사람을 접하고 더 넓은 세상을 봤어요.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고 싶어졌죠.” 그때 떠오른 직업이 바로 언론인이었다. “언론 활동이 사회와 나를 더 끈끈하게 연결해 주리라 생각했어요. 또 졸업한 학과와 상관없이 도전할 수 있어 제게 딱 맞았죠.” 고민 끝에 기자가 되기로 한 박 동문은 대학에 복학하기 전부터 언론사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책과 신문을 읽으며 여러 글을 접했고 좋은 기사는 스크랩해서 틈틈이 들여다봤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추천하는 방법은 바로 필사다. “잘 쓰인 글을 10번 넘게 베껴 쓰다 보면 그 글이 자신의 것으로 소화되기 시작해요.” 이외에도 상식, 영어, 논술 등의 시험을 스스로 준비한 그는 여러 언론사의 문을 두드렸다. 높은 입사 경쟁률에도 박 동문은 포기하지 않았고 1989년 3월, 결국 서울신문에 합격했다.
 

언론인으로서의 삶
하지만 사회 초년생으로서 박 동문이 마주한 사회는 쉽지만은 않았다. 다른 회사를 거쳐 온 동기들과 달리 실전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턴 한 번 못 해보고 바로 취업하니 사람을 대하는 데 요령이 없어 힘들었어요. 다른 동기들이 수월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경험을 더 쌓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죠.” 또한 언론 관련 수업을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박 동문은 언론학적 지식의 부족을 느꼈다. 결국 그는 경험과 이론의 부족을 채우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낮에는 기자 일을 하고 밤에는 대학원을 다녔어요. 공부 때문에 기자 일을 허투루 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두 가지 모두 정말 열심히 했죠.” 실제로 박 동문은 대학원에 재학하던 시기에 가장 많은 특종 기사를 냈다. 동시에 우리 학교 대학원에서 언론학 박사 학위까지 따내며 열정을 증명했다.


해외로 향한 도전
경험을 쌓기 위한 박 동문의 도전은 해외로 이어졌다. 회사 내에 특파원 공고가 올라오자 그는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외국에 나가 더 넓은 세상의 기사를 써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흔한 기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았죠.” 그는 특파원 활동을 회상하며 세계적인 현악기 제작자인 진창현 선생을 인터뷰한 기억을 떠올렸다. “진창현 선생님은 세계 최고의 현악기 제작자 자리에 오르기까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겪으신 분이에요. 그런데도 결코 조국인 우리나라를 잊지 않으셨기에 인터뷰하면서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죠.” 낯선 환경에서의 취재 활동에 주눅들 수 있음에도 박 동문은 일단 도전했다. “인터뷰 대상을 구할 때 인터뷰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이메일을 넣었어요.” 실제로 그는 정계 은퇴 이후 한 번도 외신에 노출되지 않았던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국회의장), 그리고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에게 메일을 보냈다. 결론은 둘 다 성공이었다. 특히 답장을 받지 못했던 무라야마 전 총리를 우연찮은 기회에 만나게 됐고, 결국 인터뷰했다. “무라야마 총리에게 이전에 인터뷰 요청했던 얘기를 하니 바로 다음 날 인터뷰를 승낙해 주셨어요. 어떻게 보면 무모한 도전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도전하지 않았다면 바뀌는 건 없었을 거예요.”


사회를 바꾸기 위한 노력
박 동문은 여러 부서를 경험했으나 특히 사회부에서 오랜 시간 일하며 특종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 수많은 특종 중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기사는 학벌 타파에 대한 기사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생기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요하게 달려들었어요.” 그는 후배와 함께 학벌 타파를 주제로 18회 분량의 시리즈 기사를 기획했으며 이를 정리한 도서인 『학벌 리포트』까지 출간했다. “학벌을 타파하고자 했을 때 반대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 누구도 어떻게 타파할 것이냐 물으면 답하지 못하죠. 학벌 타파를 어떻게 이뤄야 하는지 알아내려고 정말 열심히 취재했어요.” 이외에도 박 동문은 대학 수시 모집에서 일어나는 조작 문제 등 사회 속 여러 문제를 최전선에서 보도해 여러 차례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다.


진심으로 일을 즐기는 워커홀릭
언론인으로서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 그는 없다고 대답했다. “대부분의 생활을 즐기면서 했어요.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즐기며 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후회나 어려움 같은 단어는 제게 익숙하지 않아요.” 임원 생활까지 합쳐 거의 30여 년을 한 직장에서 일한 그는 기자로서의 성과는 매체의 종류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치에 달렸다고 말했다. “다른 기자들은 경력을 쌓기 위해 더 큰 회사로 가고 싶어 하기도 해요. 저는 기사를 담는 매체보다 매체 안에서 자신이 어떤 기사를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기사를 쓰는 활동 자체에 더욱 집중했어요. 덕분에 장기간 한 곳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그는 지면의 총책임자인 편집국장까지 맡게 됐다. 오랜 시간 꿈꿔온 자리였기에 행복했지만 때로는 부담감도 느꼈다. “저는 주로 외줄을 탄다는 표현을 써요. 순간의 판단이 그 지면이 빛날지의 여부를 가르기 때문에 때로는 위태로운 외줄을 타고 있는 것 같았죠.” 인생의 반을 언론인으로 살아온 그는 상무이사를 끝으로 서울신문에서 퇴사했다. “임원은 임기가 끝나면 바로 퇴사해야 해서 동기들보다 더 빨리 퇴직하게 됐어요. 회사를 나오면서 언론인으로서의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했죠.”


다시 돌아간 성균관
퇴사 후 외부에서 많은 제의가 들어왔지만, 박 동문은 이를 거절하고 교수직을 택했다. “요즘 사람들은 신문을 많이 보지 않잖아요. 있을 때는 모르지만 없어지면 빈자리가 큰 것이 바로 언론이거든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반드시 알아야 함을 후배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어요.” 박 동문은 우리 학교에서 미디어와 윤리 수업을 진행하며 학생들의 변화를 직접 경험하고 있다. “학기 중반쯤 되면 신문을 추천해달라고 하는 학생이나 강의 전에 뉴스를 보고 오는 학생이 생기더라고요.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요즘 학생들이 신문을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 몰라서 못 보고 있었다는 걸 느끼죠.” 교수가 되고 박 동문의 일상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기자일 때는 온갖 사건·사고를 접하다 보니 매 순간을 판단 속에서 살며 시간에 쫓겼지만, 교수가 되고서는 여유가 생겼어요. 또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다 보니 저도 지식이 쌓이더라고요.” 그는 학생들에게 기자로서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현실과 이론의 조화를 알려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론적인 부분에서는 저보다 훌륭한 교수님들이 많이 계세요. 제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이론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알려줄 수 있다는 점이죠.” 


청년들의 도전을 응원하며
박 동문의 좌우명은 겉모습과 본성이 바르고 조화롭다는 뜻의 문질빈빈이다. 이는 그가 언론인으로서 추구했던 자세이기도 하다. “좋은 언론인이란 외력에 흐트러지지 않고 지금껏 해 온 것을 굳게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박 동문은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했다. “언론에 대한 사회의 불신이 만연해요. 언론인을 꿈꾸는 학생들이나 언론인이 된 학생들이 외력에 굴하지 않고 과감히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박 동문의 인생이 끊임없는 도전이었던 만큼, 그는 청년들을 배로 비유해 항구에 정박하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고 전했다. “배가 바다에 뜨지 않고 항구에만 있으면 배라고 할 수 없죠. 사람도 시도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아요. 꿈꾸는 것 자체가 도전이고 이에 대한 장애물을 이겨내는 과정도 미래에 큰 자산이 될 거예요.”

사진ㅣ전지빈 기자 nobey@
사진ㅣ전지빈 기자 zibini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