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서연 기자 (sheonny@skkuw.com)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따라 불완전한 슈퍼히어로가 주목받기도 해

고전 영웅소설의 단절로 한국형 슈퍼히어로물 발전 더뎌

우리는 삶이 지치거나 힘들 때 빨간 망토를 입고 날아와 우리를 도와줄 ‘슈퍼맨’을 상상하곤 한다. 아이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자 어른들에게는 팍팍한 삶 속 통쾌함과 위로를 주는 슈퍼히어로. 우리의 일상을 구하러 온 슈퍼히어로는 언제부터 우리 곁에 있었을까?

대중문화로 거듭난 슈퍼히어로물
슈퍼히어로란 초능력이나 비범한 능력을 지닌 특별한 존재를 말한다. 대체로 이들은 인간 공동체를 구원한다는 사회적 임무를 지닌다. 이러한 성질은 작품에 따라 다양한 성격이 더해지며 변주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작품을 ‘슈퍼히어로물’이라고 칭한다. 슈퍼히어로물은 영웅 서사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전북대 국어국문학과 박상완 강사는 “슈퍼히어로물은 고귀하게 태어나 불행을 겪고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승리한다는 국가 불문의 영웅 서사를 따른다”고 말했다.

슈퍼히어로물은 1930년대 미국에서 만화로 처음 등장해 큰 흥행을 거뒀다. 그러나 이후 검열이 강화되는 등 만화가 억압받으며 20세기 중반에는 B급 장르로 전락해 매니아층에 의해 명맥이 이어져왔다. 하지만 만화의 영상화와 최근 CG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에 힘입어 대중문화로 부활했다. 실제로 2010년대에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열 개의 영화 중 절반의 영화가 <어벤져스: 엔드게임>, <블랙 팬서> 등의 슈퍼히어로물이라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슈퍼히어로물의 대중화를 이끈 것은 미국의 마블 엔터테인먼트와 DC 엔터테인먼트다. 특히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뛰어난 CG 기술은 슈퍼히어로의 초능력을 사실감 있게 표현하며 슈퍼히어로 영화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노하린(영문 22) 학우는 “스파이더맨이 거미줄을 쏘는 장면을 볼 때마다 현실처럼 구현되는 CG를 보며 더욱 몰입하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큰 인기를 얻은 슈퍼히어로 캐릭터는 이제 *원천 IP로서도 활용된다. 실제로 만화를 중심으로 한 상품들이 거래되는 전시회 코믹콘에서는 슈퍼히어로를 활용한 피규어나 문구 등의 다양한 상품을 만날 수 있다.

안티히어로 영화 의 한 장면.
'어벤져스: 엔드게임' 포스터. ⓒ CGV 공식 홈페이지 캡처


슈퍼히어로, 시대를 품고 변모하다
슈퍼히어로는 당대의 시대 정신을 반영해 만화와 영화 속에서 변화해왔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절 처음으로 만화책 『슈퍼맨』과 『배트맨』이 발간됐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원더우먼』이나 『캡틴 아메리카』 등에서 다양한 슈퍼히어로가 등장했다. 대공황이나 전쟁과 같이 암울한 시대에 초능력을 지닌 슈퍼히어로가 세상을 구하는 모습은 대중들에게 희망을 줬다. 서원대 웹툰콘텐츠학과 백은지 교수는 “완벽하게 정의롭고 내면적 갈등이 없는 것이 이 당시 슈퍼히어로들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이후 영화의 발달과 함께 만화 속 슈퍼히어로들이 영화로 재현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배트맨』이 극장용 영화로 제작된 것이 그 시작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엑스맨>과 같이 인간적이고 결함이 있는 슈퍼히어로를 다룬 영화가 인기를 끌었다. 이는 당시 IT 버블 붕괴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의 경제 위기와 관련 있다. 중산층이 붕괴되며 위기를 겪은 많은 사람들이 불완전한 슈퍼히어로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당시 개봉한 <배트맨 비긴즈>의 주인공 브루스 웨인은 이전의 <배트맨> 시리즈와는 다르게 트라우마를 가진다는 설정이 추가되기도 했다.

불완전한 슈퍼히어로가 인기를 얻으며 안티히어로나 내적 성장형 슈퍼히어로가 조명됐다. 안티히어로인 <베놈>과 <데드풀>의 주인공은 고전적 슈퍼히어로와 달리 규칙과 정의를 따르지 않으며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에 대해 백 교수는 “인간처럼 불완전하고 본인이 가진 초능력으로 인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완벽하지 않은 모습에 대중이 매료된 것”이라 설명했다. 한편 대표적인 내적 성장형 슈퍼히어로인 <스파이더맨>의 주인공은 초능력을 지닌 미성숙한 고등학생이지만 스스로가 슈퍼히어로임을 증명하기 위해 성장한다. 한성대 ICT디자인학부·영상애니메이션디자인트랙 전영돈 교수는 “내적 성장형 슈퍼히어로들은 보다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며 “이는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과 흡사해 대중적인 공감을 이끌어냈다”고 전했다.

나아가 현재에는 △성소수자 △여성 △유색인종 등 주목받지 못했던 소수자를 대변한 슈퍼히어로가 등장하고 있다. <이터널스>의 마동석 배우가 연기한 길가메시와 같은 아시아계 슈퍼히어로의 탄생은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드러낸다. 전 교수는 “시대별 이데올로기에 따라 슈퍼히어로는 동시대의 가치나 유행, 사회 통념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고 말했다.

현대판 한국형 슈퍼히어로물 ‘무빙’ 포스터.
안티히어로 영화 '베놈'의 한 장면. ⓒ OneVIEW 유튜브 캡처


슈퍼히어로물, 우리나라에선 안 되나요?
한편 우리나라의 슈퍼히어로물에는 미국의 슈퍼히어로물과 구분되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가톨릭대 국어국문학과 송성욱 교수는 “한국적 슈퍼히어로 세계관은 조선시대의 영웅상에서 비롯된다”며 “가족을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되는 것이나 천상계의 인물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적강 모티브가 고유한 특징”이라고 말했다. 대표적 한국형 슈퍼히어로물에는 『홍길동전』을 활용한 다양한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전우치>와 드라마 ‘각시탈’ 등이 있다. ‘각시탈’의 주인공 이강토는 형과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각시탈이 되고 이후 그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다. 나아가 최근 등장한 한국형 슈퍼히어로물 ‘무빙’에서도 이러한 가족적인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무빙’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초능력을 가진 캐릭터들은 모두 개인의 삶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본인의 초능력을 활용한다. 

하지만 한국형 슈퍼히어로물은 이러한 특징에도 불구하고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쉽지 않았다. 노 학우는 “슈퍼히어로물을 생각했을 때 우리나라의 슈퍼히어로가 바로 떠오르진 않는다”고 말했다. 이것의 가장 큰 이유는 한국형 슈퍼히어로물의 모티브가 될 수 있는 우리나라 영웅소설이 19세기 이후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영웅소설의 창작이 단절된 상황에서 서구화가 진행됐고 당시 대중들은 새로운 서양 문학에 더욱 매료돼 우리나라 영웅소설은 새롭게 창작되거나 계승되지 못했다. 또한 특정 한국형 슈퍼히어로를 담은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제작해 세계관을 형성하려는 시도도 부족했다. 거대한 자본을 기반으로 성장한 미국의 슈퍼히어로물에 비해 비주류에 속하는 한국형 슈퍼히어로물엔 연작이나 파생 작품을 위한 대형 자본이 투입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선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각시탈’과 같이 한국형 슈퍼히어로물의 영상화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연속된 시리즈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에 송 교수는 “한국형 슈퍼히어로물 세계관을 향한 집단적인 노력이 중요하다”며 “앞으로 우리나라만의 슈퍼히어로 서사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계속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왼쪽은 고전적 한국형 슈퍼히어로물 ‘각시탈’ 포스터. ⓒ KBS 공식 홈페이지 캡처,  오른쪽 '어벤져스: 엔드게임' 포스터. ⓒ CGV 공식 홈페이지 캡처
왼쪽은 고전적 한국형 슈퍼히어로물 ‘각시탈’ 포스터. ⓒ KBS 공식 홈페이지 캡처, 오른쪽  현대판 한국형 슈퍼히어로물 ‘무빙’ 포스터. ⓒ CGV 공식 홈페이지 캡처


‘좋은’ 슈퍼히어로물을 위해
슈퍼히어로물은 서사 구조가 단순하고 상업적 성격이 강하기에 오락 영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은 다양한 작품들도 존재해왔다. <엑스맨> 시리즈는 초능력을 지닌 돌연변이와 평범한 인간 사이의 갈등을 통해 소수자에 대한 편견의 문제를 다루고 다양성과 포용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에 대해 박 강사는 “초능력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 작가의 주제 의식을 풍성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기에 슈퍼히어로물은 앞으로도 다양한 분야에서 창작될 것”이라며 “단순한 능력자 배틀물이 아니라 초능력을 활용해 다양한 주제 의식을 전달하는 작품들이 창작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원천 IP=새로운 콘텐츠나 상품으로 파생이 가능한 원작 저작물.

◆적강 모티브=천상의 존재가 특정한 이유로 인간 세상에 내려온다는 우리나라 고전 소설의 주요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