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허예련 기자 (aerong@skkuw.com)

전시예술 작품은 음성해설 및 다양한 감각 활용해 향유 가능해

다감각전시가 비장애인에게도 새로운 전시 향유 방법 제시

미술관과 박물관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자. 근엄하고 엄숙한 전시장이 떠오른다. 전시예술 작품과 감상자 사이의 공간은 엄격히 유지되며 우리는 작품을 만질 수도, 그것의 온도를 느낄 수도 없다. 전시예술 작품과 감상자 사이의 물리적 공간으로 인해 우리는 오로지 눈을 활용해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 이로 인해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있다. 


전시장에서는 마주치기 어려운 시각장애인
공연이나 연극처럼 청각 정보를 동반하는 예술과 달리 대부분의 전시예술은 시각 중심적으로 구성된다. 이는 시각장애인들의 전시예술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2018년 시각장애인 12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시예술 감상은 시각장애인이 향유하는 주요 문화생활 중 3.6%로 가장 낮은 비중을 차지하기도 했다. 중증 시각장애가 있는 박지연(심리 20) 학우는 “공연물이나 영화 같은 영상물은 청각적 정보나 맥락을 통해 감상할 수 있지만 전시예술은 시각적 요소가 대부분이라 사이트의 작품 설명 등 추가 정보를 활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시각장애인들은 장애등급에 따라 형상이 보이는 정도나 정보를 수집하는 감각이 상이하다. *전맹이 아닌 시각장애인들은 전시예술을 관람할 때 *잔존시력을 활용하기도 한다. 박 학우는 “좌안의 잔존시력을 통해 정해진 경계선 안에서 최대한 작품 가까이 다가가 관람하고, 작품 옆 설명은 핸드폰으로 촬영해 확대해서 본다”며 “그러나 이러한 시도로도 작품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려워 아쉬운 마음으로 전시장을 나간 경험이 많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시각 이외의 수단을 통해 시각장애인의 전시예술 향유를 돕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이때 전시예술 감상에는 촉각, 청각 등 다양한 감각이 활용된다. 

음성 해설을 제공한 '작은 방주'. ⓒ국립현대미술관 시각정보화면해설 캡처
음성 해설을 제공한 '작은 방주'. ⓒ국립현대미술관 시각정보화면해설 캡처


만지고 듣는 전시예술
이러한 다양한 감각을 통해 전시예술을 향유하는 것을 ‘다중 감각적 접근’이라고 한다. 이때 다양한 감각을 감상에 동원하기 위해서는 원본 작품이 아닌 감각을 전환할 수 있는 매개가 필요하다. 작품을 촉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복제품이나 작품의 이미지를 반영해 조향된 향 등의 매개를 통해 향유자는 시각 정보를 감각 간 번역된 형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 매개인 음성해설은 작품 해석이나 창작 배경 등 보이는 것 너머의 영역을 설명하는 작품 해설과는 달리, 직관적으로 인식되는 작품의 시각 정보들을 언어화한 것이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최우람 작가의 작품 <작은 방주>에 대한 음성해설은 다음과 같다. ‘인조 밀짚으로 만들어진 18개의 머리 없는 지푸라기 인간들이 지름 4.5m의 검은색 원탁을 등으로 받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각 이미지 없이 언어만을 통해 향유자가 이미지를 그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음성해설의 목표다. 

그러나 오디오 파일로 제공되는 음성해설은 시공간적 구애 없이 어디서든 들을 수 있기에 전시 공간 방문의 유인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시각장애인의 전시 공간 방문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감각적 자극을 통해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현장감을 제공해야 한다. 촉각을 활용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영국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은 1985년부터 시각장애인을 위한 터치투어를 진행해 왔다. 작품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각장애인이 작품을 만져 볼 수 있도록 일부 작품을 개방하는 것이다. 지난 6월 22일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에서는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기획된 프로그램인 ‘손끝으로 보는 거장, 문신’을 진행했다. 해당 전시를 기획한 정서연 학예연구사는 “원형이 반복되는 형식의 조각품을 만져본 한 시각장애인 관람객은 우리 인생에 모나지 말고 둥글게 살라는 교훈을 주는 것 같다는 감상평을 남겼다”며 “촉각을 통해 감상했기에 오히려 시각적 편견 없이 자유로운 해석을 전해준 것 같다”고 전했다.

'손끝으로 보는 거장, 문신' 프로그램을 체험하는 시각장애인.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제공
'손끝으로 보는 거장, 문신' 프로그램을 체험하는 시각장애인.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제공
반가사유상을 표현한 향. 사진ㅣ허예련 기자 aerong@
반가사유상을 표현한 향. 사진ㅣ허예련 기자 aerong@
촉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제작한 반가사유상 제작 과정. 사진ㅣ허예련 기자 aerong@
촉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제작한 반가사유상 제작 과정. 사진ㅣ허예련 기자 aerong@
반가사유상 복제품. 사진ㅣ허예련 기자 aerong@
반가사유상 복제품. 사진ㅣ허예련 기자 aerong@


색채를 번역할 수 있을까
우리 학교 정보통신대학 조준동 교수는 “언어나 촉각을 활용해 전시예술 작품을 대부분 표현할 수 있지만 색채를 번역하기 위해서는 향기와 온도 등 다른 감각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천적 전맹 시각장애인은 색채를 지각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조 교수는 향을 통해 색채를 표현하고자 했다. 작품 <별이 빛나는 밤> 속 △달을 표현한 따뜻한 색은 캐러멜 향 △바람을 표현한 차가운 색은 페퍼민트 향 △명도 높은 별의 색은 레몬 향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조 교수는 “이러한 색채와 향의 대응은 ‘암묵적 형용사 관련성 테스트’를 통해 선택된다”고 밝혔다. 이는 피실험자에게 다양한 색채와 향을 제시한 후 연상되는 형용사를 각각 말하게 하고, 동일한 형용사를 연상시킨 것끼리 짝짓는 방식이다. 

선천적 전맹 시각장애인이 레몬 향을 맡고 노란색을 연상하기 위해서는 색채 개념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 서수연 음성해설 작가는 “맹학교에서는 통각을 느낀 경험과 빨간색의 이미지를 연결하는 것과 같이, 경험과 색채를 연결하는 교육이 이뤄진다”고 전했다. 선천적 전맹 시각장애인은 노란색을 긍정적, 발랄함, 희망, 레몬의 상큼함 등 추상적 이미지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사랑’과 같은 추상적 개념에서 따뜻한 온도나 포옹할 때 느껴지는 포근함을 연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때 음성해설 역시 색채 이미지를 적립시키는 경험의 일환이 될 수 있다. ‘어려움을 승화시키기 위해 작품에 노란색을 사용했어’와 같은 음성해설은 시각 장애인의 색채 이미지 구축을 돕는다.

다감각체험이 가능한 '별이 빛나는 밤'. 사진ㅣ허예련 기자 aerong@
다감각체험이 가능한 '별이 빛나는 밤'. 사진ㅣ허예련 기자 aerong@


다양한 감각으로 사유의 지평을 넓히다
감각 번역은 시각장애인의 전시예술 향유를 보조할 뿐만 아니라 모든 전시 관람자가 작품과 보다 긴밀하게 교감할 수 있게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되는 다중 감각 전시인 ‘여기, 우리, 반가사유상’에서는 △촉각 △후각 △청각 △시각 △빛 △디지털점자 △오디오가이드 등을 활용해 반가사유상 두 점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를 관람한 조은주(47)씨는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던 기존 전시와 달리 작품을 직접 만져볼 수 있어 좋았다”며 “반가사유상을 표현한 향을 맡으며 과거 눈을 통해 얻는 정보에 너무 치중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전시 기획자 A씨는 “전시를 방문한 모두가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감각을 활용해 문화유산을 감상했다”며 “이러한 시도를 통해 박물관이 무장애의 공간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꼈다”고 전했다. 다감각적 전시는 향유의 깊이를 더하는 것뿐 아니라 전시 작품 향유를 오래 지속하게끔 돕기도 한다. 레이첼 허친슨과 앨리슨 얼리의 연구에 따르면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는 경증 시각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 작품을 눈으로만 감상했을 때보다 음성해설을 함께 들었을 경우 심미적 기억과 감흥이 더 오랫동안 지속됐다. 한편 전시예술 작품의 감각 번역은 필연적으로 제작자의 주관을 반영하기 때문에 순수한 번역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이에 조 교수는 “같은 곡에 대한 지휘자 각자의 해석을 기반으로 하는 지휘가 창작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처럼, 전시예술 작품의 번역 역시 창작의 영역이라 볼 수 있다”고 답했다. 감각 번역은 단지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예술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전맹=시력이 0인 상태의 시각장애.

◆잔존시력=활자를 읽는 것엔 어려움이 있지만 빛을 지각할 순 있는 정도의 시력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