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유민 기자 (yumin510@skkuw.com)

자과캠 만남 - 박지규(스포츠 11) 동문

프로야구선수에서 야구 지도자로, 새로운 도전 시작해

가르친다는 것은 함께 성장한다는 것

올해 국내 프로야구 관중이 8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처럼 야구의 인기가 뜨거운 가운데, 국내 프로야구 리그(KBO)의 구단 LG 트윈스의 프로야구선수였던 박지규(스포츠 11) 동문은 2년 전부터 야구부 코치로서의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가 지도자로 머무르고 있는 세광고 근처에서 만나 박 동문의 야구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활발했던 어린 소년, 야구 인생을 시작하다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나고 자랐던 박 동문은 어린 시절부터 야구 중계방송을 보며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세월이 흘러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버지의 말을 빌리면 제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야구 경기 방송을 보면서 야구선수가 될 것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해요.” 활동적인 운동을 선호했던 소년은 운동선수로서의 인생을 남들보다 일찍 시작했다. “어렸을 때는 진득하게 앉아있는 것보다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는 활발한 성격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성격 때문에 초등학교 3학년이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야구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죠.” 프로야구선수로서 가졌던 팀 내 포지션도 이때부터 정해졌다. “어렸을 때는 왜소하고 키가 작아서 엄청 날쌨어요. 그래서 내야수라는 수비 포지션으로 야구 인생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박 동문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광역시로 이사 가서도 꾸준히 야구선수 활동을 이어 나갔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힘들기도 했지만 중학교의 야구부에 들어가서 훈련을 계속했어요.” 


대학 진학에 대한 고민
박 동문은 대구상원고의 야구부에 들어가며 아마추어 선수의 길을 걸었다. 고등학교 시절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서도 박 동문은 솔직하게 답했다. “고등학생 때는 프로야구단에서 지명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춘기를 겪으며 많이 힘들어했어요.” 당시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해왔던 야구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었다.

박 동문은 덤덤하게 당시의 고민을 털어놨다. “강도 높은 훈련으로 몸과 마음이 지치기도 했었고 ‘대학에 진학해서 뭐 하냐’는 철없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힘들어하던 박 동문의 곁에는 든든한 주변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의 고등학교 코치님과 졸업생 형들까지 저를 찾아와 대학에 가서 야구를 계속하라고 힘을 북돋아 줬어요.” 더불어 박 동문은 어머니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어머니께서 대학교 졸업장만 따자고 저를 설득하셨던 기억이 나요. 어머니의 부탁이라 정말 마지막으로 야구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스포츠과학과에 진학했죠.” 우리 학교 스포츠과학과에 진학해 야구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박 동문의 야구 인생에서의 신의 한 수였다. “대구상원고 김승관 감독님께서 대학은 가야 한다며 미숙했던 저를 설득해 주셨어요. 지금도 감독님께 매우 감사하죠.”


꾸준한 노력이 빛을 보다
아마추어 야구선수에게 프로야구단에 입단한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다. “대학에 진학하며 야구를 계속하게 됐지만 사실 프로야구단에 입단하는 것은 저에게는 먼 이야기라고 느껴지기도 했어요. 내가 과연 갈 수 있는 곳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기도 했죠.” 하지만 박 동문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다. “무조건 프로야구선수가 돼야 한다는 강박관념 없이 하루하루를 묵묵히, 또 열심히 살자는 마음가짐으로 임했어요.” 박 동문의 야구 실력은 대학 시절을 거치며 눈에 띄게 향상됐다. “고등학생 때는 실력이 부족했지만 노력하다 보니 대학생 때는 야구를 잘하게 됐어요. 돌이켜 보면 대학생 때 야구를 하며 정말 행복했었고, 실력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두려운 것이 없었던 것 같아요.” 박 동문은 스스로를 믿게 되며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스스로를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학교 이연수 감독님 덕분이었어요. 당시에 야구부 주장을 맡았었는데 감독님께서 늘 저를 믿어 주셨어요.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감독의 믿음을 느낄 때 선수는 더욱 강해지는 것 같아요.” 박 동문은 대학 시절의 훈련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겨울 전지훈련이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겨울 전지훈련은 약 30일 정도 진행이 되는데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거의 쉬는 시간도 없이 훈련을 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버텨냈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힘들었거든요.” 박 동문은 가족을 떠올리며 힘든 일상을 이겨낼 수 있었다. “사실 어머니가 대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이런 시련을 견뎌내면서 몸과 마음이 성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훈련이 지치고 힘들 때마다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이겨낼 수 있었어요.” 

박 동문에게 2015 *KBO 신인 드래프트(이하 드래프트)의 현장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평생 잊기 힘든 기억이죠. 아직도 그때 느꼈던 감정이 생생해요.” 드래프트 일정이 다가왔을 때 박 동문은 광주에서 대회 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감독님께서 첫 경기가 끝나고 뜬금없이 저에게 드래프트장을 가보라고 하셨어요. 아마추어 선수들이 프로로 지명되기 전에는 선수 언급이 미리 조금씩 나오는데 저는 그런 게 전혀 없었거든요.” 그러나 놀랍게도 박 동문은 드래프트에서 LG 트윈스에게 지명받았다. 박 동문은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을 허심탄회하게 전했다. “제 이름이 지명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얼떨떨했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어요.” 박 동문은 당시 지명받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조심스레 예측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격형 내야수와 내야의 모든 포지션을 맡을 수 있는 선수였기에 지명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프로야구선수의 삶을 살아가다
박 동문에게 야구는 어떤 의미인지 묻자 그는 인생의 전부라고 답했다. “그냥 제 인생의 전부인 것 같아요. 힘든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야구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했기에 프로 구단에 입단해 제 이름을 알릴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인생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죠.” 야구는 하나의 시즌이 시작되면 약 7개월 동안 경기가 진행되는 만큼 장기적인 체력이 요구되는 스포츠다. “야구는 시즌 내내 장기 레이스를 해야 하는 스포츠예요. 경기가 끝나고서는 상대 구단의 투수와 타자에 대한 전력 분석을 하며 추가 운동도 진행하죠. 원정 경기가 있을 때는 새벽에도 이동을 해요.” 힘든 일상들이 반복돼 지쳐도 박 동문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묵묵히 이겨냈다.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느냐는 질문에 박 동문은 모든 경기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전했다. “저는 타석에 섰던 모든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해요. 당시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등 스스로를 파악하기 위해 타석에 섰던 영상들을 셀 수 없이 돌려봤죠.” 박 동문은 자신과 LG 트윈스의 팬들에게 큰 의미가 있었던 경기인 2015년 9월 8일의 경기를 회상하기도 했다. “경기가 무승부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별 기대 없이 타석에 섰어요. 당시 12회 말 2아웃에서 마지막 공격인 상황이었는데 사람이 엄청난 집중을 하면 공이 느리게 보이더라고요. 그 순간에 끝내기 안타를 쳐서 역전승을 이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만화의 한 장면 같았어요.”

하지만 박 동문은 프로야구단에 입단한 지 5년 만에 야구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2018년에 슬라이딩을 하다가 어깨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어요. 공을 던지는 쪽 어깨의 부상이었기에 저에게는 야구선수로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죠.” 이후 박 동문은 수술을 받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어깨 수술을 하고 재활까지 2~3년 정도가 걸리는데 재활한다고 해서 어깨 상태가 완전히 전과 같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수술을 받지 않았고 그 후로는 부담이 생겨 마음 놓고 공을 칠 수가 없었어요. 결국 2020년도에 은퇴를 결정하게 됐죠.” 그러나 박 동문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은퇴는 온전히 저의 결정이었고 프로야구선수로서 딱 거기까지였다고 마음을 다잡았기에 후회하지 않아요.”


선수가 아닌 지도자의 길을 걷다
박 동문은 프로야구선수를 은퇴한 후 지도자가 되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과거에는 강압적인 지도자가 많았어요. 야구선수들에게 명령하는 식의 훈련이 답답했죠. 지도 방식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지도자의 역할에 도전했어요.” 박 동문의 첫 도전은 상무 피닉스 야구단의 수비 코치였다. “상무 피닉스 박치왕 감독님께서 저를 불러주셔서 좋은 기회로 상무 피닉스의 코치로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죠.” 첫 코치 생활을 시작했던 박 동문은 당시 부족한 점이 많기도 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야구밖에 모르기 때문에 게임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어렵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매우 좁아요. 그래서 사회에서의 소통 능력이나 실무에서 필요한 일 처리 센스 등이 정말 부족했었죠.” 이에 박 동문은 배우는 자세를 강조했다. “박 감독님께 많은 것을 배우며 저는 선수가 아닌 진정한 사회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어요.”

이후 박 동문은 지난 1월부터 세광고 야구부의 코치로 부임했다. “상무 피닉스에서는 완성된 선수들을 가르쳤지만 지금은 미성숙한 고등학생 선수들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어려움을 느끼기도 해요.” 그러나 박 동문은 이런 어려움이 서로가 성숙해지는 과정 같다고 전했다. “아마추어 선수들의 실력이 늘면서 정신적으로도 어른이 돼가는 과정에 제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힘든 것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여전히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지만요.” 박 동문에게 지도자 생활에서 언제 뿌듯함을 느끼는지 물었다. “제가 지도하는 선수들의 실력이 늘었다고 느낄 때 가장 뿌듯해요. 좋은 경기를 만들어 낸다면 져도 상관없어요. 아이들이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박 동문은 앞으로 이루고 싶은 지도자로서의 목표도 밝혔다. “우선은 현재에 충실하기 위해 아마추어 선수들을 가르치며 진정한 코칭이 무엇인지 계속 배울 생각이에요. 또한 지도자로서 완전하게 성장했을 때 LG 트윈스의 코치로도 가보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최종 목표는 모교인 성균관대에서 감독이 되는 것입니다.”


늦게 피는 꽃이 가장 아름다운 법
박 동문은 우리 학교 후배들에게 자신만의 강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야구를 예로 들자면, 롤모델을 가질 수는 있지만 자신만의 개성 없이 그 선수의 기술을 똑같이 따라 하려고 하면 안 돼요.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타인의 강점을 모방하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박 동문은 이른 성공을 기대하는 것보다 꾸준히 노력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저는 고등학교 선수 시절에 부족한 야구 실력으로 인해서 일찍이 프로야구선수가 되지 못했어도 대학교에 진학한 후 남들보다 늦게 꽃을 피웠었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낙심하지 말라고 후배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KBO 신인 드래프트=KBO 리그의 각 구단이 고등학교나 대학의 아마추어 야구 선수들을 지명해 팀에 영입할 수 있는 연례 행사.

사진ㅣ김유민 기자 yumin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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