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 리뷰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현실은 차디차다. '이건 현실이야'라는 이야기는 영화에서나 나오는 흔해빠진 대사가 아니다. 모두들 현실의 냉혹한 감촉을 피부로 느끼고 있으며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영화 <시>는 현실에 스며있는 돈에 대한 욕구와 인간의 끈적한 욕망으로 얼룩져있다. 하지만 시를 사랑하는 주인공 덕분에 그 얼룩이 조금은 흐릿해 보인다.

주인공인 양미자는 66세 할머니지만 시종일관 멋쟁이다. 영화배우고 쓸 법한 챙 넓은 흰색 모자와 하늘하늘한 치마를 입고 언제나 뾰족구두를 신고 다닌다. 고상한 그 모습과 어울리게 그녀는 시를 좋아한다. 마을에서 열리는 시 강의를 신청하기도 하고 시 낭송 모임에도 나간다.

하지만 그녀의 현실은 화려한 차림새와 어울리지 않는다. 생활보호 대상자로 지정되어 있고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돌보는 일로 생계를 이어나간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인 손자와 단둘이 살고 있다. 손자는 툴툴거리면서도 할머니의 말에 순응하는 착한 아이지만 친구들과 또래 여중생 성폭행에 가담하게 된다. 후에 그 여중생은 강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학교 측과 학부모들은 이 사건을 덮으려 한다. 위자료는 500만 원. 하지만 그녀의 형편에는 어림없는 액수이다. 결국, 양미자는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그것을 빌미로 할아버지로부터 500만 원을 받아내 피해자와의 합의를 끝낸다.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되는 듯이 보였지만, 후에 경찰이 찾아와 손자를 연행해 간다. 경찰차에 타는 손자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행적을 감춘다.

인간의 성적 욕망과 돈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현실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그런 현실의 적나라함은 시로 인해서 누그러든다. 위자료를 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주인공은 시 강좌에서 배운 '시상을 떠올리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 사과를 뚫어지라 보기도 하고, 나뭇잎 사이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수첩에 그때의 느낌을 한두 줄 적는다. 글귀를 적을 때 그녀의 표정은 세상의 모든 번뇌가 사라진 듯 보인다. 그렇게 인간의 정욕과 관련된 사건에 집중하다가도, 주인공이 적는 순수한 문구에 다시 긴장이 풀리는 과정이 반복되는 구조가 <시>의 묘미로 다가온다.

영화 속 시의 역할은 '가리개'이다. 인간의 욕망으로 더럽혀진 현실이지만 그 현실은 '시'라는 매개체로 순화돼 나타나고, 사람들의 생각에 정제된 상태로 스며든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시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어느 날 그녀가 듣는 시 강좌에서 사람들은 아프고 쓰린 자신들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그중에는 음담패설도 있고 불륜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이 담겨있는 그들의 인생사는 전혀 불순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칫 외설적일 수 있는 이야기가 순화돼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의 고백이 '시'를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마친 사람들의 얼굴에는 평온이 감돈다.

지금까지의 상념을 정리하면, 시는 진실한 언어의 모임이며 사람들에게 순화된 감정을 전달한다. 그러한 시를 창작하는 시인은 어떤 살마들일까? 그들은 '질문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자신이 겪은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내가 체험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이에 사람들은 다시 자신들의 인생을 섞어 나름대로 해석을 내놓는다.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사유의 공간은 점점 넓어진다. 결국 시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유 공간을 넓혀주는 기회를 주는 징검다리이다. 영화 속 더러운 현실을 표현하는 장면 중간 중간 양미자의 글귀가 나타난다. 그 글귀는 살마들의 생각에 주인공의상념을 더해, 그들의 사유 공간을 확장시키는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