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규빈 기자 (kyubin@skkuw.com)

고행을 뜻했던 여행이 설렘을 안겨주기까지

최근에는 여행지에서 일상을 경험해

천고마비(天高馬肥).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으로 가을의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말이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부터 울긋불긋한 단풍, 선선한 날씨와 다양한 먹거리까지 즐길 거리가 다양한 가을에는 유독 여행길에 오르는 사람이 많다. 과거에도 지금처럼 여행하는 사람이 많았을까? 여행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행의 계절이라고도 불리는 가을을 맞이해 과거부터 지금까지 여행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알아보자.

종교적 고행으로서의 중세 시대 여행
여행이란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본래 거주지를 떠나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을 말한다. 김은교(경영 23) 학우는 “나에게 여행은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 에너지를 주는 활력소”라며 최근 여행으로 즐거웠던 경험을 회상했다. 이처럼 현대인들에게 여행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설렘을 안겨주는 단어다. 그러나 과거의 여행은 현재의 인식과 달랐다. 여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트래블(travel)’은 ‘고행, 노고’를 뜻하는 고대 프랑스 단어인 ‘트래바일(travail)’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도로망이 황폐해져 도시 간 이동 시간이 길었고 도로가 포장되지 않아 짐수레가 전복되는 일도 허다했다. 치안도 좋지 않아 여행 중 강도를 만나거나 사나운 짐승의 습격을 받는 일이 잦았다. 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자신의 고장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여행을 떠나는 경우에는 기도를 올리거나 유언을 남겼다. 중세 시대 함부르크에서 작성된 유언장의 20%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작성한 것이었을 정도다. 봉건제 하의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로 △군인 △상인 △종교 순례자 등을 제외하고는 법적으로 이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중세 시대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의 영향력이 컸다. 특히 서양의 경우 근검절약의 종교적 이념에 의해 여행의 암흑기를 거쳤다. 세속적인 향락을 금지했던 만큼 휴식을 위한 여행은 ‘악’으로 치부됐고 사람들은 일생의 대부분을 노동의 시간으로 보냈다. 따라서 당시 서양에서의 여행은 주로 성지 순례와 같이 신앙심 추구를 위한 종교적 고행으로서의 의미를 가졌다. 한편 우리나라 역시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종교적 목적의 여행이 활발했다. 서양과 같이 세속적 향락을 금지했던 것은 아니나 불교가 융성했던 만큼 많은 신도는 불교 행사에 참여하거나 유명 사찰을 찾는 순례를 떠났다.
 

산업혁명과 함께 발전한 여행 산업
19세기에 중산층이 성장하고 교통수단이 발달하며 여행은 근대성을 띠게 됐다. 우리 학교 사학과 김민철 교수는 “19세기 서양에서 신분에 따른 법적 이동 제한이 폐지되고 산업혁명으로 도시에 일자리가 많아져 농촌에서 도시로 일하러 온 사람이 많아졌다”며 “이와 더불어 철도가 만들어진 것이 여행이 근대화된 가장 큰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근대 관광 산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토머스 쿡이 철도 관광 상품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증기선과 증기기관차 등 다양한 교통수단이 출현하면서 여행의 대중화가 시작됐다. 토머스 쿡은 세계 최초의 여행사인 ‘토머스 쿡 앤 선’을 설립하며 단체 관광의 문을 열었고 이후 여러 나라에서도 많은 여행사가 등장했다. 이에 △숙박시설 △여행용품 세트 △패키지여행 등 각종 여행 서비스가 등장하며 여행 산업은 더욱 활성화됐다. 19세기 후반부터 서양 사람들은 노동의 피로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휴양과 쾌락을 위한 여행이 자리 잡은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교통의 발달과 함께 근대화된 여행이 시작됐다.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개통을 시작으로 경부선, 경의선이 차례로 개통되며 도시 간 이동이 편해졌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 지배하에 있었던 우리나라는 단순히 휴식만을 위해 여행하지 못했다. 1910년대 초 일제는 국내 관광단을 조직해 조선인들에게 경성을 비롯한 대도시를 관광하게 했다. △극장 △백화점 △카페 등의 서양식 근대 건축물과 전차와 같은 일제의 근대 문화를 접하며 굴복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식민 정책을 펼쳤다. 우리나라에서 휴식의 의미를 가진 여행 사업이 본격화된 것은 1961년 관광사업진흥법 제정 이후다. 관련 제도나 사업이 활성화되고 교통이 발달하면서 여행은 점점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일상을 경험하다
최근에는 여가를 중시하는 경향에 발맞춰 여행이 보편화되고 있다. 특히 여행과 일상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지며 여행지에서 새로운 일상을 경험하는 체류형 여행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농촌 여행 △다른 나라의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의료 관광 △여행지에서 일을 하는 워케이션 △한 달 살기 등 체류형 여행의 유형도 다양해지고 있다. 한양대 행복 여행센터 정산설 교수는 “2015년 무렵 유럽을 중심으로 프리랜서들 사이에서 워케이션 등 체류형 여행이 시작됐다”며 “코로나 이후 재택근무 비율이 30~40%로 증가하면서 체류형 여행이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체류형 여행은 지방의 인구 소멸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체류형 여행자는 그 지역에서 일을 하거나 소비 활동을 하기에 인구 소멸로 인한 경기 침체와 노동력 부족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체류형 여행의 수요가 늘며 각 지방은 스쳐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머무를 수 있는 장소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라남도는 20년 새 20만 명의 인구가 줄며 인구 소멸 문제에 직면함과 더불어 전체 관광객 가운데 숙박시설을 이용하는 비율이 1.9%에 불과할 정도로 당일치기 여행이 많았다. 이에 ‘남도에서 한 달 여행하기’ 프로그램 개발, 워케이션 센터 설치 등을 통해 체류형 여행을 활성화하고 있다. 또한 한 달 살기 여행지로 인기인 제주도는 마을 여행 브랜드인 ‘카름 스테이’와 연계해 생활 공간으로서의 제주도를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체류형 여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조윤영(미술 20) 학우는 “1년간의 휴학을 마무리하며 떠난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통해 나와 현재에 집중할 수 있었다”며  “짧게 다녀오는 여행과는 달리 여유롭고 느긋하게 즐길 수 있어 좋았다”고 전했다. 정 교수는 “재택 문화가 보편적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체류형 여행의 유행은 지속될 것”이라며 “코로나 이후 진정한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여 자연 속에서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도모하는 웰니스 관광과 캠핑과 같은 아웃도어 여행이 주목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