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수빈 기자 (newbien@skkuw.com)

인간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 지구엔 강대한 외계 존재들이 있었다. 인간이 나타난 이래로, 사람들은 미신과 주술, 꿈속 환상으로만 이들을 얼핏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런 방식으로 우연히 외계 악신(惡神)들을 만나는 운 없는 사람은 파국에 다다른다. 그들이 부활할 때, 세상은 광기와 유혈에 물들 것이다.

▲ H.P 러브크래프트./ⓒPeter Farris
이것이 공포 문학의 거장으로 추앙받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가 만든 ‘크툴루 신화’의 뼈대다. 펄프 잡지에 발표된 그의 중·단편이 모여 20세기에 새로운 신화를 구축해낸 것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는 그로테스크한 장면과 광기가 한결같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그는 저항·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묘사해나간다. 그런 ‘크툴루 신화’의 특징이 잘 드러난 단편이 바로 ‘크툴루의 부름’이다.
러브크래프트의 대표작 ‘크툴루의 부름’은 화자가 증조부의 유품을 찾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화자는 증조부의 유품을 통해 고대신을 숭배하는 이교도와 미신을 추적해나간다. 예언에 따라 바닷속에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악신 크툴루가 때가 되면 일어설 것이었으나, 다행히 한 용감한 선원이 부활하던 크툴루를 증기선으로 들이받아 그를 가라앉힌다. 그러나 크툴루는 죽지 않았다. 그가 언젠가 세계를 파괴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남기며 이야기는 끝맺는다.
러브크래프트는 자신의 신화 속에 가상의 종교나 지역 등을 창안하고, 이를 여러 작품에 반복적으로 소개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그의 작품에 몰입한 사람들은 러브크래프트가 마련한 정교한 구상이 진짜라고 믿기도 한다. 일례로 '네크로노미콘'이라는 마도서가 그의 작품에 등장한다. 미국 도서관 협회의 조사를 따르면, 해마다 이 책을 찾는 사람들의 수가 2%나 된다.
▲ 기독교 인과 전투 중인 크툴루./ⓒp3nt4gr4m
러브크래프트의 사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크툴루 신화가 살아남고 확대될 수 있던 까닭은 어거스트 덜레스의 공로가 크다. 러브크래프트가 죽은 뒤, 덜레스는 크툴루 신화를 체계화한 소설을 발표하거나 직접 ‘아컴 출판사’를 차려 러브크래프트의 생전 작품을 출간했던 것이다. 다양한 작가들도 여기에 가세해 크툴루 신화의 세계관을 확장해나갔다. 나중에는 소설의 영역을 벗어나 다른 문화 매체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크툴루의 부름’만 하더라도 △게임 △영화 △노래 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직접 세계관을 채용한 것 이외에 특유의 음울하고 허무주의적인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작품도 많다. 게임 ‘데드스페이스’ 시리즈의 주인공 아이작 클라크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수많은 시체 괴물과 미지의 외계 존재, 그리고 광기에 맞서야만 한다. 공포 문학가 스티븐 킹의 작품들도 러브크래프트식 설명되지 않는 공포와 으스스한 분위기를 계승한다.
크툴루 신화는 오늘날 문화계 영역 전반에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정작 러브크래프트가 유물론, 무신론자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나 역설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