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선박 중개인으로, 자신의 지인과의 모임 중 괴한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때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권총을 쏘아 그 괴한을 사살한다. 이로 인해 재판을 받게 되며 그는 자신의 행동 모두가 우연의 일치이며 아무런 개연성 없는 행동의 연속임을 이야기한다. 이는 물론 인정되지 않고, 검사 측은 긴밀하고 논리적인 연결로 그의 행동들을 설명하며 그의 범죄가 계획되었으리라 판단한다.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역시 만연하게 보여진다. 사회에서, 각각의 개인이 타인의 행동을 판단할 때, 심지어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볼 때
여러분들은 과거에 모두 아동이었다. 그렇다면 아동에게 가장 필요한 권리는 무엇일까? 그 답은 ‘친부모와 같이 살 권리’가 아닐까. 이것은 지구상의 모든 국가가 인정하는 것이다. 유엔은 전세계 196개국이 비준한 ‘아동권리협약(The 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1989) 제 7조에서 아동이 부모를 알고 부모에 의하여 양육받을 권리가 있음을 명기했다.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재난, 질병, 기근, 전쟁 등으로 부모가 일찍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의붓아버지나 어머니, 혹
그러니 종종 도망가도 좋으니꼭 돌아와야 한단다.
일반적으로 법은 정의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한자에서 법(法)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水)이 흘러가는(去) 모습처럼 순리적인 것 또는 결국에는 낮은 곳에 모여 수평을 이루는 모습처럼 공평한 것을 의미한다. 많은 서구어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들 언어에서 법은 올바름이나 정당함을 뜻하는 어휘와 동일하다. Recht(독일), droit(프랑스), diritto(이태리), derecho(스페인)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법과 정의의 내적 연관을 시사한다. 이 속에서 정의는 법의 본성으로 사고된다.다른 한편, 우리는 의회가 제정한 규범을
지금 당장 할 것은 많은데 하고 싶은 건 없었던 잉여롭던 2학년 말미. 다만 조금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겸한, 절대적인 자유를 느끼던 나에게 새로운 자극제는 성대신문 지원이었다. 너무나 자유분방했기에 단지 ‘지원’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의 대학생 2학년이라면 해야할 소명은 다 한 것과 같은 뿌듯함을 느꼈다. 기자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나에게 성대신문 지원은 뭐라도 했다는 말도 안되는 안도감을 줬다. 덜컥 신문사에 합격하고 약 한달 남짓한 시간동안 수습트레이닝을 받았다. 사실 별 생
올해의 목표를 정하는 나쁜 습관이 있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올 A+받기’, ‘책 100권 읽기’ 같은 허황된 것이었는데, 대부분 이루지 못했다. 이뤄지긴커녕, 벚꽃이 피기도 전에 벌써 구석에 처박힌 다이어리를 펼쳐보고는 ‘그러고 보니 이런 게 있었지’ 하는 식으로 적당히 넘어가고 내년을 기약했다. 매년 이러다 보니, ‘올해의 목표’를 정하고 까먹어버리는 게 연례행사처럼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쁜 습관을 그만두기로 했다.대신 ‘꼭 올해까지만 할 수 있는 것’의 리스트를 만들기로 했다. 내 생각은 아니고, 인스타그램 어디선가 본 거
의식하는 글쓰기는 참 두렵다. 늘 하는 생각이다.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도 날카로운 눈 아래 문장들은 더없이 너절해진다. 내 얄팍한 생각을 담아내야 할 때면 마음은 더 졸아든다.단연 글쓰기만이 아니다. 보통 자기반성적인 글은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시점에서 써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여전히 모자람에서 오는 부끄러움이 두렵다.부끄러움을 없애는 방법은 제법 간단하다. 피하면 된다. 왜, 삼십육계 줄행랑 – 도망치는 게 상책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비상구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나는 내가 강해지는 줄 알았다.사실 정말로 강한 사람은 자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다. 후회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진정한 나를 알아간다. 2022년 9월 나는 또 한 번 후회하기 위해 성대신문에 지원했다. 전역을 하고 이전의 패기가 사라진 내 모습을 보며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머릿속은 복잡했고 자신감은 떨어져 있었다. 잘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생각했다. 국어 하나는 잘할 수 있었기에 국문과에 진학했고, 국어강사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평생 가질 내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후회가 필요했다. 누군가는 너무 늦은 것이 아닌지 걱정했다. 그러나 이전에도 인생에서 큰 결정을 할
나이를 먹으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시간이 흐르면 하나라도 느는 것이 배움이고 경험이라, 그저 흘러가게 두는 것만으로도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세상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할 줄도 균형을 잡을 줄도 아는 그런 어른, 제법 현명하게 제 삶을 꾸려나가는 법을 아는 그런 어른 말이다. 하지만 막상 시간이 지날수록 모르는 것이 더 커지는 느낌이 든다. 대학에 와서 공부를 하다 보니,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몰랐는지 새롭게 깨닫는다. 어차피 공부란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라지만, 배우고 익힐수록 ‘드디어 알겠는
제일 좋아하는 것은 칭찬이요, 극도로 피하는 것은 비판이라. 혹자는 비난과 비판을 구분하라 말하지만, 그런거 모르겠고 그 둘을 싸잡아 싫어한다. 그런 내가 성대 신문에 들어왔다. 처음 문건과 초고를 체커에게 넘기고 우수수 달린 수정 요청 메모들을 보고 괜히 우울했다. ‘그렇게 별로인가?’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메모들을 모두 반영하면 글이 더 매끄러워졌다. 누군가 좋은 글이란, 아무 문장이나 하나를 삭제하면 나머지 문장 전체가 우수수 쏟아진다고 말했었다. 이는 모든 문장이 필수적이며, 앞 뒤 문장이 서로를 야무지게
글 쓰는 과제를 마주할 때면, 항상 남모르게 미소 짓곤 했다. 적당한 참고 자료를 뒤적거리며 정리하고, 내 생각을 담아 글을 마무리하는 일은 계속해오던 일이라 그런지 실패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글 쓰는 데 성공과 실패가 어디 있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지금까지 써온 글이 모두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단일한 기준만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얼마나 잘 드러나는가?’ 따라서 글 속의 참고 자료도, 글의 배치도 내 생각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게 써왔다. 내 글을 읽을 사람은 선생님 아니면 교수님으로 정
삶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들은 인연이다. 나는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연을 가장한 인연, 인연은 우연을 가장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와 성대신문, 성대신문의 모든 기자님들이 인연이였나보다.2022년 겨울, 멀게만 느껴졌던 서울에 올라왔다. 많은 게 낯설고 모든 게 신기했다. 대학교라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공간에서 성균관대학교 학생으로서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처음이여서 많은 부분들이 어려웠지만 모두 다 그렇듯이 나도 대학교에 점차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수업도 듣고, 기숙사에도 살아보고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