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학과랬죠?” “상대성 이론은 물리학과 2학년도 이해하기 어려운데..”인터뷰를 마치며 교수님으로부터 기특함, 그리고 우려가 섞인 질문을 받았다. 아인슈타인 시대 때에는 단 몇 명밖에 이해하지 못했던 상대성 이론에 대해 과학이라고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배운 지식이 전부인 인문계 학생이 쓴다고 하니 그럴만하다. 무슨 기사 쓰냐는 말에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에 대해 쓰려구요”라고 대답할 때마다 느꼈던 사람들의 반응은 나와 과학 사이에 더 큰 벽을 쳤다.인문사회캠퍼스 경영학과에 입학한 순간, 아니 고등학교 2학년 때 문과를 선택한
약속에 늦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차가 너무 막혔던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친구에게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친구는 내 이유를 받아들일 줄 알았다. 아니었다. 친구는 ‘일찍 출발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 했다. 그 순간 내 ‘이유’는 ‘핑계’로 바뀌었다. 그랬다. 약속을 지킨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 했던 말을 지키려고 했지만 상황이 문제였다. 그럴 때 마다 난, 이유를 만들었다. 내가 만든 이유는 정당하다고 되뇌며 어쩔 수 없음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결국 핑계를 늘어놓은 꼴이 돼버렸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까닭이
‘돈이 문제가 아니다. 신뢰의 문제다.’ 학생회비 결산안을 취재하면서 더욱 강해진 생각이다. 최근, 많은 학생회들이 재정상의 어려움을 호소했고, 그 결과로 인상안은 통과됐다. 하지만 학생회비를 인상하는 과정에서도 학우들에게 학생회비를 인상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명확히 제시 하지 못했고, 학우들의 의견을 듣는 공론의 장이 형성되지 못했다. 이와 함께 늘어난 학생회비에 대해 뚜렷한 사용 목적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공감한 학우들은 이번 인사캠 전학대회에 많은 관심을 보여, 수많은 학우들이 참관인석 뒤에 선 채로 전학대회에
여름과 가을이 공존하던 그 즈음의 일이다. 밤이 되면 날씨가 쌀쌀해져 겉옷을 걸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성대신문을 읽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보도부에서는 매학기 있는 양 캠의 전학대회에 관한 기사를 다룬다. 우리 학교에서 학생자치를 논의하는 자리 중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갖는 회의이기에 기사화될 정당성은 확실히 갖추고 있지만 사실 그 권위에 비해 존재감은 미미하다. 전학대회에 ‘그들만의 리그’라는 수식어가 어울린 지 벌써 오래다. 말 그대로 전학대회는 총학과 단과대 구성원의 소모임 같은 곳이 돼 버렸다. 전학대회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오직 글을 통해서만 세상을 살아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몹시 폐쇄적이고 비사회적인 사람이었다. 근래의 나는 세상을 살아내면서 글을 쓰고 있다. 신문상의 지면이 넓어진 만큼 나와 세상의 접촉면도 넓어진 느낌이다. 그래서 신문사에서 나는 행복하다. 취재 때문에 밥때를 놓쳐 식사하지 못하고 버스에서 끼니를 때워도, 수면이 부족해도 괜찮다.‘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어지는’(박준) 문장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런 문장을 발견하면 나는 메모를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들려준다. 그런 문장을 쓰고 싶었다. 읽고 나서 애가
내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친구’가 하나 있다. 사실, 친구라고 부르는 것조차 민망할 만큼 나는 그 친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워낙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가 까다롭기까지 해서 그 친구에게 쉽사리 가까이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의 근황을 전해 듣게 됐다. 오랜만에 친구의 소식을 들으니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언제나 그랬듯 그 친구의 목소리는 단조로웠고,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괜스레 민망해졌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는 KI
“딸아, 난 네가 제일 부러워. 넌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잖아. 엄마는 엄마아빠가 없어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야.” 인터뷰 중에 한 친구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야기를 꺼냈을 때, 문득 이때의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그 날 엄마는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전화기가 할아버지 손이라도 되는 듯 그것만 붙잡고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표현이 뭔지 알 것도 같았다. 그 날 엄마의 하늘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취재를 하며 나는 이렇게 종종 나 자신과 마주했다. 잊고 있
사진은 과거의 시간을 붙잡는 기술이다. 그 기술은 원래 화가의 손끝에서 나왔다. 그림은 화가의 사조에 따라 그 모습이 왜곡되기도 하고 아예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과거의 모습을 눈 안에 사실적으로 담는 것은 그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 사진 기술이 발명된 것은 19세기 초반이다. 그러나 눈부신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누구나 휴대전화에 카메라를 장착하고 다니는 시기가 됐다. 이어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기록에 남기고자 했다. 그렇게 시작 된 것이 초상사진이다. 이전까지 초상화로만 남기던 것을 조금 더 사실적으로
엄마가 매주 챙겨보는 방송이 생겼다. ‘TV를 그다지 즐겨보지 않는 엄마가 웬일이지’라는 생각에 그 방송을 찾아봤다. 음식의 맛과 역사, 문화에 관해 얘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맛 칼럼니스트’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 ‘맛’에 대한 글을 쓴다는 건가. 호기심이 생겨 찾아본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글은 음식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글을 읽을수록 그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여러 번 보낸 메일을 보낸 끝에 답장을 받았다. ‘화요일 오후 2시, 방송국 근처 카페에서 봐요’그를 만나러 조용한
마음이 무겁다. 아주 싼 가격에 음식을 팔며 주위에 온정을 전하는 따뜻한 모습을 잔뜩 카메라에 담아 오리라 마음먹었다. 동숭동까진 좋았다. 낙원동이 문제였다. 늦은 밤 8시. 탑골공원을 지나며 잔뜩 긴장했다. 공원 입구에 이불을 깔고 취침 준비를 하는 노숙인. 고주망태가 돼서 전봇대에 기대 뻗은 아저씨.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탑골공원 옆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얼마 안 가 ‘부자촌’ 식당의 모습이 보였다. 생각보다 조용한 실내 분위기에 조금 안도했다. 사장님께 취재를 부탁하고 가게 구석구석을 찍고 있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사진
“아이고, 우리 기자님들 저 먼 곳에서 이까지 오느라 정말로 수고했겠네.”약 3시간 30분이 걸렸다. 그렇게 도착한 광주는 서울보다 훨씬 더워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광주 버스터미널에서 한국광기술원은 급행버스로 약 1시간 거리였고, 근처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탄 버스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10분쯤 갔을까. 다음 정류장을 알려주는 버스의 알림 소리가 들렸다. 왠지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들어 버스 노선도를 봤다. 이 방향이 아니었다. 황급히 내려 육교를 건너 반대 방향으로 갔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광기술원에 도착했다. 이
“아, 촬영도 해요? 지금 상태 메롱인데…” 권순호 디자이너를 만난 곳은 김포였다. 나는 마감에 시달리는 그를 다음 주까지 기사가 나야한다며 졸랐고, 그는 마지못해 인터뷰를 허락했다. 김포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카페, 식당, 아파트 하나 보이지 않는 역에서 당황하며 있으니 차 한 대가 왔다. “집으로 가시죠.” 그는 카페에서는 촬영을 하기 좀 그렇다며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의외였다. 방금 전까지도 엄마한테 보내던 그 이모티콘을 만든 사람의 집이면, 바닥부터 천장까지 캐릭터로 도배돼 있고, ‘네오’가 그려진 커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