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은 학보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이 질문에 한 독자로서 나는 학보만이 보일 수 있는 고유한 정체성이라 답하겠다. 기사의 완성도는 물론 중요한 문제지만 그것은 우선 독자가 기사를 읽기 시작한 이후의 이야기다. 기성 언론이 비추지 않는 곳을 향하는 시선, 투박할지라도 화두에 대한 ‘성대신문다운’ 통찰을 담으려는 시도는 곧 독자가 ‘굳이’ 성대신문을 펼칠 이유가 된다. 그런 면에서 보도면이 보이는 시선은 날카롭다. 보도 1면의 기사는 소재가 인상적이다. 소재가 신문을 찾아온 경우가 아닌, 기자가 소재를 찾아 나선 경우로 보인다. 앞
평화롭고 온건하다. 필자가 다닌 지 4년이 되어가는 우리 학교로부터 받은 인상이다. 동의하는 이도, 동의하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다. 다른 대학 교정에 놀러 갔다가 학생들의 의견이 가득 적힌 대자보나 대학 본부를 규탄하는 현수막이 걸린 것을 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 인사캠과 자과캠이 분리돼 의견을 직접적으로 공유할 학생사회가 작기 때문일 수도 있고, 대학 측이 일을 원활히 해 큰 잡음이 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덕분에 우리 학교를 떠올리면 따뜻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들어 좋지만 조용한 학생사회가 아쉽기도 하다.이러한 학생사회의
성대신문 1714호의 마지막 면을 장식한 기자는 취재 후기를 통해 기자의 역할은 현상을 목격하고 이를 거시적으로 조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성대신문 1714호의 기사들은 수많은 ‘나무’를 목격하고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며, 독자인 학우들에게 생각할 화두를 던져 ‘숲’을 조망했다. 먼저 2, 3면의 공약 점검 기사들이 그러하다. 우리 학교 자연과학 캠퍼스 학생자치기구들의 공약 이행 현황을 보기 쉽게 색깔별로 정리한 표가 눈에 띈다. 학생자치기구의 공약과 그 이행률을 상세히 짚어봄으로써 학교를 운영하는 학생자치기구의
5월 초는 축제의 물결이었다. 지난 3일에서 4일은 자과캠에서 성균제가 열렸고 7일과 8일은 인사캠에서 대동제가 열렸다. 성대신문 제1711호에서 보도면은 양 캠퍼스의 축제를 다뤘으며, 문화면에서도 대학축제의 현주소를 짚었다. 보도면의 ‘다시 분리된 대동제 콘셉트, 성균관 어떻게 담아냈나’에서는 지난해와 달라진 축제의 컨셉 전반을 다뤘다. 이번에 양 캠퍼스가 다른 컨셉으로 축제를 전개한 이유와 각 컨셉의 의미에 대한 학우들의 의문을 해소해 준 기사라고 생각한다. ‘성공적인 축제 뒤 숨겨진 땀방울’에서 숨겨진 실무단과 학교 측의 노력
“경제학이 무너지고 있다.” 교수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번 학기 첫 번째 수업 시간이었다. “인공지능이 수많은 경제학적 사실들을 도출해내고 있다. 그런데 그걸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시도가 턱없이 부족하다.” 시작부터 이렇게 비관적이라니. 이제 막 마스크를 벗고 캠퍼스의 봄을 느끼려던 참이었는데 말이다.인공지능에 관한 관심이 뜨겁다. 성대신문 1706호 역시 학술면을 넘어 여론면에서도 챗GPT에 관한 논의를 이어갔다. 기술에 대한 놀라움, 글쓰기와 윤리에 관한 고민 등 다양한 생각들이 담겨 있었다. 하나는 확실했다. 인공지능의 시
인류사에서 ‘밥상’만큼이나 많은 대화가 오간 공간이 있을까? 밥과 테이블, 마주 앉은 두 사람으로 이뤄진 밥상 위 배치는 여러 유형의 장(場)으로 거듭난다. 정보 교환의 장이자 중대사를 논하는 장이고, 관계를 결속하는 장이자 논쟁과 합의를 수행하는 장이다.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언론의 원칙은 여럿 있다. 그 모든 원칙을 한 문장으로 묶는다면 “공동체의 밥상 위로 올라가라”라고 표현하고 싶다. 기자가 쓰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밥상에서 나누는 대화, 사람들의 밥상 위로 올라갈 대화여야 한다.이런 원칙으로 비춰 볼 때, 최근 지면에 눈에 띄
학보사에 몸담게 된 순간부터 대학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 스스로 계속 되물었다. 에브리타임보다 느린 정보와 지면 기사에 익숙하지 않은 학우들 사이에서 ‘학보 기사’가 설 수 있는 자리는 그리 넓지 않다. 그럼에도 슬기롭게 대학 언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성대신문을 보며 재차 감탄했다.먼저 1면부터 3면까지 이어지는 자과캠 공약 점검 기사는 1699호에서 가장 돋보이는 기사였다. 시들어가는 학생자치 가운데서 학생회의 공약 이행 여부를 꼼꼼하게 확인하는 학우들은 적어지고 있다.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단과대의
많은 사람이 ‘성대신문’이라는 학보가 한 학기에 8번이나 발간되는 것에 대해 모를 것이다. 정보의 홍수라고 불리는 시대상황을 반영하듯,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선 종이 신문을 읽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줄어든 학생활동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암울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성대신문의 지난 호는 성대신문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존재가치를 보여주었다.먼저, 학보가 가지는 존재가치는 대학생이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난 호 성대신문을 살펴보자면 오너리스크 문제에서부터 전통문화의 재해석, 전문대
성대신문의 기사들은 대체로 기성 언론의 기사보다 길다. 한 기자가 책임져야 하는 지면의 크기가 크고 이에 따라 기사의 매수도 늘어난다. 매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곧 기자의 손과 발이 분주해짐을 의미한다. 넓은 기사의 공간을 메우기 위해 분주했을 기사 뒤편의 기자들을 생각해보게 된다.이번 호 성대신문의 보도면 기사들에는 교내 정보가 많이 실렸다. 이런 경우에는 기자의 발이 보인다. 다양한 학우와 교직원, 교수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동분서주했을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자신들이 찾은 정보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봤을 그들을
발길이 뜸해진 학보실 앞에는 전국 각지에서 날아든 우편이 즐비하다. 학보 기자들의 노고를 알기에 함부로 버릴 수 없는 신문들이 대부분이다.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솎아내는 일은 늘 편집국장의 몫이다. 우편을 분류하다 보면 꼭 한 번씩 펼쳐보게 되는 학보들이 있다. 성대신문도 그중 하나다. 정갈한 레이아웃과 수려한 일러스트가 특징인 성대신문은 내용 면에서도 대학 언론의 선두 주자라 할 만하다. 이미 완벽에 가까운 신문이지만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픈 마음에 구태여 사족을 붙여본다.일반적으로 독자들은 사진, 헤드라인, 기사 순으로 신문을 훑
누군가의 글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글 자체뿐만 아니라 글을 쓴 사람의 노력까지 감히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필자는 기사와 관련된 지식이 부족하고 기사를 쓴 기자의 과정과 노력에 대해 무지하므로, 기사에 대한 전문적인 의견을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글에 대한 필자의 생각보다는 성대신문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1년이 넘게 장기화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취재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좋은 소재를 찾아 학우들에게 전달하려는 기자들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
작년 말에서 올해 초 사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가 중국에서 보고되고 전세계로 퍼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감염되고, 고통 받고, 죽었다. 다양한 루머들이 쏟아졌고, 일부 지역에 대한 비난이 확산되었고, 국가 간 책임 돌리기로 분쟁이 발생하면서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전염병 확산을 예방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다양한 논란이 있었다. 정부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이동을 제한하면서 자유의 문제가 대두되었고, 감염자의 이동 경로를 낱낱이 밝힘으로써 사생활 침해에 관한 논란도 일었다. 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서로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우리 대학 신문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보사의 신문을 많이 읽는다. 저마다 다른 특성과 강점을 가진 학보사들의 신문을 읽으며 어떤 점을 우리 신문에 녹여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성대신문은 참 친절한 신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2면 ‘호실 내에서도 마스크 착용 ··· 방역 강화한 기숙사’ 기사에서 봉룡학사와 명륜학사를 따로 설명한 것을 보고 큰 인상을 받았다. 대학보도를 하면서 고민되는 지점 중 하나는 독자가 기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느 정도까지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가이다. 대학 실
인간의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형태는 크게 대인 커뮤니케이션과 매스 커뮤니케이션 두 가지로 나뉜다. 대인 커뮤니케이션은 사람과 사람이 직접 대면하는 인격적 커뮤니케이션이라고도 한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매체를 통한 간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근대 이전에서의 공동체 사회에서는 대인 커뮤니케이션이 주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인 반면 사회의 발전에 따라 공동체가 점차 붕괴되고 사회적 환경이 확대되어 근대사회가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매스 커뮤니케이션 역시 중요한 형태로 대두되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이러한 사회발전 단계
“학보를 안 읽는 사람을 탓할 게 아니라 학보를 읽고 싶게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지난 서울여대학보를 발행한 후 비수가 되어 꽂힌 말이다. 요즘 학보를 누가 읽는지 묻는 가시 돋은 질문에도 무관심한 학우의 무지몽매함이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원인은 독자가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결국 학우들에게 선택받지 못한 학보는 의미가 없었다. 독자층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학보는 읽히지 않고 버림받는다. 주 독자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본인이 성대신문 1656호를 펼쳤을 때 FYE프로그램 개편에 대한 보도가 가장 먼저 눈에 띄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우리가 왜 무엇인가를 하느냐는 질문에는 다양한 대답이 돌아올 수 있다. 가장 간단한 답은 ‘그러고 싶으니까’ 일 것이다. 여행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 혹은 강압에 의해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여행은 분명 의지와 바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다. 아마 여행이 직업인 사람들은 여행이 너무 즐거워서 업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그러나 우리가 왜 여행을 떠나느냐고 물을 때에,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바에 따라 행위하는 존재임을 재확인 하려는 질문이 아니다. 만약 이 물음이 그토록 사
싱그러운 나무보다 캠퍼스 곳곳에 있는 신문 배부대에 눈이 가는 요즘이다. 일요일에 배부된 신문이 금요일쯤 바닥나는 한 주가 있고 그렇지 못한 주도 있다. 어쩌다 비가 오는 날이면 신문이 빨리 동나기도 한다. 어차피 버려질 신문, 우산 대용으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씁쓸한 생각이다. 팔리지 못하고 편집국으로 되돌아오는 신문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소비자 입맛에 맞지 않았구나.”기사는 상품성이 있어야 한다.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해 선택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기사에서 독자를 유혹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팩트폭행’이라는 말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허언이나 거짓된 정보 등을 말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누구나 납득할 수밖에 없는 사실, 즉 팩트를 제시하여 해당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알리는 행위로, 이게 반박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폭행’과 같은 충격을 준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요즘의 그것은 본래의 의미에서 많이 변질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폭력이라는 단어가 언어적으로 보기 좋지 않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지금의 팩트폭행은 확실히 초기의 그 의미와는 많이 다르다. 과거의 의미는 퇴색되고 어느새 상호 간
내가 영상을 하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나는 영상 크루 활동을 시작했다. 현장 속에서 실무를 배우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크루 활동으로는 부족함을 느껴 곧 영상 실무와 관련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같은 크루 활동을 하는 친구들에게도 조언을 얻고는 했다. 그들은 나에게 한번쯤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했지만, 다들 공통적으로 말리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방송 촬영 현장 아르바이트였다. 한 친구는 이것에 자신의 경험을 덧붙였다. 메이킹을 찍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 연속된 밤샘 촬영 끝
여름빛이 지나간 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벌써 늦가을로 접어들었다. 쌀쌀하게 부는 바람을 보면 겨울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처음 성대신문 모니터링 요원을 시작했을 때는 따뜻한 봄이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다시금 실감했다.이번 1571호 성대신문을 읽고 마음에 와닿은 생각은 ‘따뜻해졌다’라는 것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 학교에서의 여론과 그 뜨거운 논의, 학술적 정보 및 다채로운 기사들은 보는내내 미소를 짓게 하였다. 물론 미소를 지으면서 한편으로는 기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예전보다 ‘학술’면의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