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쓰고 싶다는 욕심에 취재후기를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편집회의에 들고 가야 할 문건을 쓰다가 혹은 기사를 쓰다가 막히는 순간이 오면 성대신문 홈페이지에서 선배들의 취재후기를 읽고, 또 읽는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글과 잘 다듬어진 문장에서 공감을 하기도, 감동을 받기도 한다. 나에게는 ‘취재후기’가 단순하지 않았다. ‘사실’만 가득한 지면 속에서 취재후기는 사람의 감정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코너라고 늘 생각해왔다. 내 신문사 생활의 마침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 잘 쓰고 싶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풀
신문사에 처음 발 디뎠을 때가 생각난다. 어색한 공기와 산발적인 타자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려있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들을 겪을지 모른 채, 함께 할 사람들을 먼저 만났다. 처음에는 불편하기만 한 동기들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성향인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니. 무섭기만 했다. 그런데 곧 그들이 내가 신문사 생활을 버티게 해준 이유가 됐다. 이제는 얼굴만 봐도 힘이 되는 사람들이다.한 편의 기사를 지면에 싣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일을 해야 했다. 자료조사부터 시작해 문건을 작성하고 편집회의에서 수차례 피드
내가 취재하며 가장 많이 한 말이 ‘안녕하세요 성대신문 보도부 기자 유다겸입니다’였다. 학내 사안을 다루는 보도부에 들어와 학교와 컨택할 일이 많아 학교 측과 인터뷰할 때 저렇게 나의 신분을 밝히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 ‘보도부 기자 유다겸’이라는 말이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너무 부족하다는 나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울리는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1년 동안 저 멘트와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그렇다. 나는 어느덧 신문사 임기
뉴스는 도처에 깔려 있다. 그리고 바이라인은 뉴스의 끝마다 달려 있다. 종이신문뿐만 아니라 모바일 메신저에도 어느 새 뉴스를 보는 란이 생겨서, 심심할 때면 스마트폰만 들고 기사 제목을 한 번씩 훑어보는 것이 일상이 됐다. 참 신기한 일이다. 넘쳐흐르는 콘텐츠의 시대에도 글자가 가지는 힘은 살아 있다. 성대신문에 들어온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종이 위로 흥미로운 주제를 잡아내고 싶었고, 쉽게 쓴 말로 풀어내보고 싶었다. 기자들은 항상 전화를 들고 질문을 주고 받을까? 인터뷰 음성을 녹음하고, 내용을 곱씹고 타이핑을 하고. 마지막으
성대신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무작정 지원서를 냈던 지난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호암관 신문사에서 나는 열심히 논술 문제를 풀었고, 면접에서는 긴장한 목소리로 최선을 다하겠다며 다짐했다. 힘들고 바쁘겠지라는 각오를 어느정도 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수습기자부터 실전 업무에 투입되는 준정기자, 정기자까지. 이 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바쁜 생활이었다.기사 하나를 세상 밖으로 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들이 필요하다. 소재 기획부터 회의 피드백을 거쳐 취재, 인터뷰, 체크, 교열까지. 수많은 인원이 참
“Drive it like you stole it”, 영화 의 메인 삽입곡이자 내 인생의 좌우명이다. 경쾌한 밴드 음악과 당당한 가사가 내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 말 그대로 “훔친 듯이 달려라”, 네 인생이니 열심히 하고 싶은 대로 달리라는 뜻이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가다 힘이 부칠 때면 본가에 있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쓴 다이어리를 다시 읽어본다. 나를 채찍질하는 말들, 친구들의 응원 쪽지, 그 시절의 내 모습을 되새기며 다이어리를 닫고 다시 달려간다. 그러나 다이어리는 절대 자취방으로 들고 오지 않는다. 그곳이 다
11월 30일,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성대신문의 마지막 조판회의가 끝나고 있다. 치열했던 신문사 생활이라고 하기엔 그 마지막은 조용하고 허무하다. 성대신문에 왜 들어가겠다고 다짐했을까. 처음부터 기자가 되고 싶어 신문사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내 자신을 깨우쳐 나가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추상적이고 사소한 동기만으로 신문사 생활을 하기엔 한계에 부딪힐 때가 많았다. 성대신문 기자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책임감이 있었고, 기사를 완성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다. 헤르만 헤세가 소설 『싯다르타』에서 형상화하고자 했던 말로, 진리는 직접 터득해야 한다는 의미다. 내 인생에 큰 가르침을 준 이 교훈. 너무나 값진 이 교훈은 내 수습일기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진부하지만 나는 다시금 진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1658호 사회부 기사는 기획 단계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주제 선정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주제를 선정한 후에도 주제를 구체화하기 어려웠다. 신문사 내에서도 우리 사회부의 주제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종교는 민감하고 어려운 사안이라 서술하는 데에 어려움
그날은 유독 이상한 날이었다. 성대신문에 지원서를 내던 날 말이다. 평소와는 다르게 아침에 눈이 번쩍 떠진 것도, 교수님께서 갑자기 휴강을 공지하셔서 학교에 가다가 집으로 돌아간 것도 모두 이상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했던 건 선배 기자로 활동하던 친구 기자의 모습을 보고 나는 저렇게 바쁜 일은 하지 말아야지, 좀 더 쉬운 일을 찾아야지, 힘들게 대학에 왔으니 조금 쉬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내가 갑자기 웬 바람이 불었는지 성대신문에 지원하게 된 것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의미 있는 대학 생활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던 것
노을이나 어스름같이 아름다운 것을 담으려는 사람의 뒷모습을 가만 바라본다. 매일 반복되지만 순간이기에 아름다운 것을 지나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간절해서 예쁘다. 다시 태어나면 높고 큰 나무가 돼야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더 오래도록 바라봐야지 생각한다.새해가 되면 매번 일상을 소중히 여기자고 다짐한다. 얼마 전에 본 영화 은 동형 반복되는 일주일 속에서도 각자의 디테일로 채워진 하루는 한편의 시이자 예술이 된다고 이야기했다. 모든 삶은 저마다 빛나는 유일한 걸작이므로. 그리고 신문사는 일상에 미묘한 변주들을 안겨줬다.여러
고등학교 때부터 막연히 언론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대학 입시 자기소개서에도 소외계층을 위해서 노력하고 사회의 부조리함을 고발하는 언론인이 되고 싶다며 당차게 포부를 적었었다. 하지만 신문사에 들어온지 반 학기가 지난 요즘, 이제는 언론인이 되고 싶지 않다.준정기자 때에는 형식적인 기사들만 다뤘어서 ‘나도 다른 보도부원들처럼 학내 사안 취재해서 기깔나는 기사 좀 써보자!’고 생각했었다. 정기자가 된 지금은, 준정기자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정기자가 되고 나서 예민할 수 있는 학내 사안을 다루다 보니 취재 협조를 얻
정기자가 된 후로도 벌써 세 번째 발간이 끝났다. 정기자의 특권인 취재 후기를 쓰자니 성대 신문에서의 지난날이 떠오른다. 동기들과 어색하게 둘러앉아 트레이닝을 받던 수습기자, 모든 것이 새롭고 어려웠던 준정기자를 지나 어느덧 한 부서의 부서장이 된 정기자까지. 글이 빽빽한 문건을 다 읽지도 못해 허둥지둥하던 첫 번째 편집회의를 떠올리면, 기계적으로 문건을 보고 피드백을 하게 된 나의 변화가 신기할 따름이다.생각해 보면 신문사를 통해 나는 정말 많이 변화했다. 글을 읽기 싫어하고 휴대 전화만 들여다보던 내가 글이 가득한 문건과 기사를
톡톡톡.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가 우산을 두드린다. 간혹 우산을 피한 빗방울이 나를 때리면 내 마음은 빗물 모양대로 움푹 팼다. 한 폭의 기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신경을 쏟고 나면 몸과 정신은 액체괴물이 된다. 미술시장을 취재하면서 기뻤던 일은 기뻤던 모양대로 자국이 남고, 힘들던 일은 힘들던 모양대로 자국이 남았다. 자국은 오래도록 남아 생각할 거리를 만든다.[맨발의 박 기자] 중앙대 이 교수를 만나는 과정은 낭만적이었다. 그의 논문을 접하고 꼭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었다. 두 차례의 메일을 보내도 답이 없자 학교 행정실에 전화했다.
이번 미래학 기사를 쓰기 위해 박성원 국회미래연구위원을 인터뷰하러 국회에 다녀왔다. 미래학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을 얻기 위해 인터뷰하러 간 것이다. 그런데 인터뷰 이후, 미래학에 대한 궁금증은 풀렸지만, 우리 사회가 어떤 비전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인터뷰이는 ‘미래학의 가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하던 도중 나와 사진기자에게 우리는 미래에 대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현재에 집중해서 살아왔기에 사실 그 질문을 들었을 때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어떤 답을 해야 하지?’라는 생각에
어느덧 이번 학기 마지막 발간이 됐다. 마지막 발간의 취재후기를 쓴다는 부담감에 쉽게 글을 시작할 수 없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알기에 더욱더 괴로웠다. 몇 글자 되지 않지만 그 속에 진득한 메시지를 담고 싶었고, 울림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글은 꼬여만 갔고 마감 시간은 다가왔다. 3학기 동안 신문사 활동을 했다고 글 실력이 나아지지는 않았나 보다. 결국 기사 마감 압박에 못 이겨 지금껏 썼던 글을 다 지우고 나에게 ‘성대신문’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적어보려 한다.우선, 지금까지 쓴 기사를 다시 살
1650호 보도부 기획을 준비하며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기획을 잡는 것을 시작으로 취재하고 기사 초고를 작성하며 체크를 받는 것까지 어느 하나 순탄하게 지나가지 않았다. 시간이 부족해 수업 도중에 취재를 가고 기사 주제가 명확하지 않아 마감 당일 기사를 다시 작성하는 등 기자로서 나의 자질에 대해 한계를 많이 느꼈다.지난해 3월 기자를 하고 싶다고 마음먹고 복학과 동시에 성대신문을 지원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쓴 적이 없어도 ‘하면 된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성대신문을 하며 내가 안일하게 생
최근 몇 년 동안 성대신문에서 두 기자가 한 기사를 같이 쓴 적은 없었다. 사진기자가 글기자와 동행해 취재하거나,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텀을 나눠 기사를 쓸 때는 있었다. 그러나 소재 선정부터 취재, 기사 작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두 기자가 함께한 적은 없었다.이번 호부터 새롭게 내보인 코너인 ‘반촌돋보기’에서는 두 기자가 함께했다. ‘반촌돋보기’는 우리 지역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쳐 기사를 쓰는 코너다. 취재범위가 넓어 한 명이 모든 일을 하기 힘들기에 두 기자가 함께했다.그렇게 박성환 기자와 함께 ‘반촌돋보기’를 맡았다. 우리
참치를 이용해 참치 통조림을 만들지만, 참치를 보지 않고 참치 통조림만 본 사람은 참치의 본 모습을 알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기사 역시 마찬가지다. 독자들은 기사를 통해 진실에 다가갈 수는 있겠지만 진실에 도달할 수는 없다. 기자는 객관을 수집하고 그것을 주관으로 가공해 객관적인 양 세상에 내놓는다. 참치 통조림을 참치를 본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지만, 기자는 기사를 통해 독자들이 세상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내가 수습기자일 때 가장 먼저 썼던 글이 ‘바른 기자상’이었다. 지난해의 나는 진실만을 보
내가 알고, 보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와 더불어 ‘글을 남들보다 조금 잘 쓰는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만심이 나를 성대신문으로 이끌었다. 호된 수습 트레이닝을 겨우 버티고 임명식을 할 때 “진실만을 전하는 기자가 되겠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그때는 몰랐다. ‘진실’이라는 단어의 무게를.준정기자 때는 피해를 보는 쪽, 동정 여론을 얻고 있는 쪽을 대변하면 진실하고 정의로운 기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성대신문 사회부 위상에는 ‘사회적 약자의 권익 향상을 위한 소수
사소하게 신경 쓰이는 것들이 있다. 발 사이즈보다 5만큼 더 커서 발뒤꿈치에서 달랑거리는 235 신발, 매번 인형이 바뀌지만 내가 원하는 인형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인형 뽑기 기계, 작고 흔한 맛이지만 항상 사람들이 복작복작한 마카롱 가게.신문사도 그 정도만 신경 쓰이는 일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머릿속에서 잠깐 까먹었다가도 오래지 않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이었다면 조금 더 편하게 생활하지 않았을까,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그만큼 신경 쓸 일이 많은 신문사 생활이었다. 기사를 잘 쓰는 것도, 인터뷰를 부탁드리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