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남들 다 졸업하는 나이에 무슨 학보사를 들어가냐? 출근 문제로 기숙사에 올라와 따로 살던 내가, 학교에서 또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는 것에 대한 아빠의 반응은 그랬다. 나도 그 생각에 적잖이 동의했던 건 사실이다. 그때까지도 공시를 볼지, 언론고시를 준비할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한 학기의 수습기자 생활이 끝나고, 어느새 방중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새로운 일에 슬그머니 익숙해지는 중이다. 어디서나 늘 띄어 쓰던 콜론(:) 표시를 습관적으로 붙여서 쓸 만큼. 수습 기간도 일로 본다면 본의 아니게 투잡을 뛰며
대학에서의 첫 학기를 집에서 보내고 든 생각 ‘나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나?’ 나는 워낙 집순이에다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긴장하는 탓에 외출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면 온라인으로 진행된 한 학기 동안은 거의 고3처럼 집에서 강의 듣고 과제만 하는 식으로 살았다. 정말 “사이버”대학에 다닌 것이다.1학기가 끝나고 친구들을 만나니 누구는 밴드 동아리에 들어가 곧 있으면 공연을 한다고 하고, 누구는 반수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이 들며 다음 학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한다. 보통 이 말은 언론의 영향력과 그 책임이 강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나는 수습기간을 겪어오며 이 말을 조금 다르게 해석해도 될 것 같다고 느꼈다. 작년 9월에 수습기자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단순히 ‘잘 해보자!’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내 마음가짐을 고쳐야 했다. 그렇게 추상적인 열정만 가지고 부딪히기엔 성대신문의 체계는 날카롭고 꼼꼼했다. 매주 월요일(혹은 수요일)에 트레이닝을 받다가 부서별 과제를 할 때는 초반부에 가졌던 내 마음가짐을 돌아보며 절망감을 느
코로나로 세상이 멈춰버린지 반년이 되는 때 나는 성대신문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흔히들 농담처럼 ‘사망년’이라고 부르는 삼학년이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하기 시작해야한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이러한 불안과 별개로 뭐든 시작할 때 남들이 한 번 생각할 것을 열 번 더 생각하는 성격이라 성대신문에 지원서를 내기까지에도 많은 고민이 있었다.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의심했고 힘들다고 소문난 학보사 일을 과연 끝까지 해낼 끈기를 가졌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과 고민들을 딛고 나는 시작해보기로 결심했다. 본격적인 트레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수습기자 지원 시기가 늦춰지면서 수습 트레이닝 일정에 변동이 생겼다. 일주일에 한번 나오는 일정에서 이틀로 바뀌었고, 이를 학교 과제와 함께 수행하려니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면접과 논술을 보고 들어온 상황에서 포기하고 나가버린 다면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것 같았다. 그래서 매번 ‘이 과제만 끝내자.’라는 마음으로 트레이닝을 받았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트레이닝이 끝나 있었다. 사실 저 마음가짐으로 만은 수습을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트레이닝 막바지에는 학교 과제 마감일하고 겹치는 게 많아
항상 꿈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사회의 소수자들에 관한 기사를 보면서 속으로 분노하며 생각하게 됐다. ‘나는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가야지.’ 이렇게 기자라는 꿈을 꾸게 됐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꼭 신문사에 들어가겠다는 일념 하에 학교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신입생인데도 불구하고 패기 넘치게 신문사에 지원하게 됐다. 수습기자 트레이닝 때도 기자가 돼 글을 쓸 생각에 그저 설렜고 과제를 할 때도 힘들기보다는 어떻게 해야지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더 컸던 것 같다. 물론 많이 힘들지
나의 세상에는 100퍼센트가 없다. 뉴스를 봐서 알게 되는 현실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하나이다. 부동산 시장의 원리를 모르고, 비리의 내막을 모르고, 불합리하다 여겨지는 판결의 과정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나는 비리가 비리인줄 모르고, 잘못된 판결이 잘못된 줄 모르는 사람이다.서로 상이한 전문가라는 이들의 말을 분별해 들을 줄도 모른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뉴스는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그 기만을 파악할 줄 모른다. 모르는 게 너무 많은 나머지, 기자가 꿈이라는 사람이 한동안 뉴스를 끊었다. 자신에 대해서
어렸을 때부터 나는 겁이 많은 아이였다. 주변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게 무서워서 항상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고, 욕심이 나더라도 항상 그 후의 일을 걱정하며 내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애써 모른 체하며 살아왔다. 난 한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그 덕에 평탄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그러나 항상 마음 속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다. 과연 내가 정말 이런 사람일까? 난 이것밖에 못할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진짜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일까? 나 자신에 대한 의문은 항상 스스로를 괴롭혀 왔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시작을 원망하곤 한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그렇다. 나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얼마 전에 고구마 맛탕을 만들려다 태워 버렸다. 딱딱한 고구마를 씹으니 신나서 요리를 시작하던 한 시간 전의 나에 대한 후회가 들었다. 오래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설렘에 가득 찼던 시작을 원망했다. “에이, 시작하지 말 걸”은 마법의 말이다. 시작 자체가 없었다면 이후의 어려움도 없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시작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 실패와 어려움은 분명 무섭지만, 살아가며 얻는 여러 기쁨은 용기내어
휴식은 사탕과도 같다. 바쁜 일상 속에서 이따금 주어지는 사탕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고 삶을 달콤하게 해준다. 하지만 달콤하다는 이유로 사탕만 먹으면 그 행복감은 사라지고 건강하지 못한 몸만 남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살다가 가끔 쉬어주는 것은 삶의 원동력이 되지만, 매일같이 쉬기만 하는 것은 결국 무기력이 우리를 집어삼키게 한다.지난 1년 동안 나는 후자의 삶을 살았었다. 학업과 주어진 인연들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적당히 임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모두가 스물 한 살의 누군가가 되었지만 나만 열
2학년 2학기를 끝내고 성대신문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많이 망설였다. 조금 늦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반,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반이었다. 그러던 중 성대신문의 여론면에 있던 취재 후기를 읽고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책임감을 가지고 끝까지 노력하면 꿀맛같은 성취감이란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마음을 울렸기 때문이다.대학에 들어온 이후 책임감을 가지고 무언가 일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공부도 적당히, 시험도 적당히. 뭐든 중간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처음 성대신문의 수습기자 생활
성대신문에게안녕, 성대신문아. 우리 만난 지 얼마 안 됐지? 이제 겨우 2달밖에 안 됐으니 당신은 내가 낯설 거야. 세상의 질서가 바뀌어서 이 편지가 너에게 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너를 만나고 보낸 지난 2달 가까운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느낀 점을 담아보려 이렇게 편지 보내.나는 항상 늦는 사람이야. 생각의 과정도 길고 결정도 늦고. 내가 글을 쓰고 싶다는 사실도 군대에 들어가 22살을 맞이하고서야 깨달았어. 그런 내가 느린 걸음으로 이번에 향한 게 네가 있는 곳이었고 지금도 천천히 너랑 발을 맞추고 있어.너에게 가는 첫걸음부
나는 그동안 늘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왔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해봤지만 늘 도돌이표였다.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이 되었지만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확신이 없는 미래에 대해 막연한 고민만 할 뿐이었다.더는 고민만 할 수는 없었던 나는 도전을 하기로 했다.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했고,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보고 싶었다. 현실에 안주하는 일상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성대신문은 도전이었고, 시작이었다.수습 트레이닝을 받고 과제를 하는 와중에도
난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아 ‘기자’라는 길을 결정하기 무척 어려웠다. 성대신문에 입사해야겠다는 결정은 그 길의 첫걸음이다. 발에 무거운 추를 달고 있는 것처럼 쉽게 디뎌지지 않는 첫걸음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첫걸음을 디딘지도 벌써 몇 개월이 흘렀다. 지금 나는 어느새 준정기자가 되었고, 정신없이 방중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활동을 하다보니 기자는 더욱 가슴 뛰는 꿈이 되었다.‘준비가 철저하면 근심할 것이 없다.’어려운 첫걸음이었지만 타이트하게 수습기자 트레이닝을 받았기에 근심 없이 준정기자로서의 일을 해내고 있는 것
늘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일들을 동경했다. 멋지게 춤도 춰보고 싶었고, 연극도 해보고 싶었다. 그랬던 나는 성대신문사의 수습 트레이닝을 마치고 방중 활동을 하고 있다. 8월 엠티도, 부산여행도, 소중한 방학의 아침잠도 떠나보냈다. 학교 언론사에 들어가고 싶어서 신문사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기자를 꿈꾸는 것도 아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 사람들과 함께 뭔가를 힘들게 만들어가는 일이 너무 멋져보였다. 내가 동경했던 것들의 공통점이었다.종로02
어느 날 일을 마치고 기숙사에 들어갔더니 내 신문사 생활에 대해 잘 아는 룸메이트가 갑자기 이런 말을 건넸다. “야 넌 요즘 행복하겠다. 시험압박도 없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적당히 바쁘고.” 이 말을 들으니 나름의 충격을 받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짧은 시간 안에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고 나도 많이 변했다.나는 집으로 배송된 성대신문을 읽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성대신문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교에 처음 와본 것도 대학교 친구들을 처음 사귄 것도 이곳 성대신문 덕이었다. 나의 대학 생활을 신문으로 만든다면 1면에는 성대신문 이
고등학교 3년 내내 생활기록부 장래희망 칸에는 언론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진학한 학과와는 무관해 보이지만, 학창 시절 언론에 관심이 많았다. 언론이 제대로 기능한다면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언론인을 꿈꿨다. 지금은 언론인의 꿈을 잠시 접어둔 것은 다른 진로를 생각해보고 싶었고, 궁극적인 목표인 더 나은 사회는 다른 직업으로도 이룰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고, 깊은 생각을 했던 학창 시절과는 달리 대학생이 된 후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신문과 책을 멀리했으며 놀기에 바빴다. 이런 삶이 스스로
나는 언제나 읽는 쪽이었다. 시인의 멋진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어본다거나, 어느 책의 배경에 있는 역사적인 사건을 찾아본다거나, 감상문을 쓰면서 글에 대한 평가를 내려 보는 식이었다. 그렇게 읽히는 글은 모두 완성체로서 일종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감히 내가 개입해서 글을 뒤틀거나 문장의 순서를 바꿔보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쓰기와 읽기의 영역은 언제까지나 철저하게 구분되어 왔다. 그 구분만큼 느끼는 단절이 있었다. 금잔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눈에 띄면 챙기는 신문도 마찬가지였다.성대신문에 들어온 데
‘친구 따라 강남 간다’ 우리는 이 속담을 좋은 뜻으로 쓰지는 않는다. 이 속담의 사전적인 정의도 ‘자기는 하고 싶지 아니하나 남에게 끌려서 덩달아 하게 됨을 이르는 말’인 것을 봐도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어찌 보면 내가 성대 신문에 들어오게 된 것도 ‘친구 따라 강남 간다.’와 느낌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확히는 하고 싶지 않았다기보다 망설이고 있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항상 했던 생각이 체계적이고 번듯한 학교 활동을 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친구가 성대신문에 들어오라고 권유했을 때, 이렇게 가벼운 마음가짐
신문사의 막내가 된 지도 얼추 한 달 반.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다. 마음은 아직 수습에 머물러 있는데 내 몸은 얼결에 준정기자 직함을 달고 기획 문건을 쓰고 있다. 쓰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건지, 삽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긴가민가하며 괜히 선배들의 기획 문건 엿보는 실력만 늘었다. 그래도 매일 신문사에 출근 도장을 찍고 선배 기자들 옆에서 흉내라도 내면 익숙해지기라도 할 텐데 설상가상 들이닥친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마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사태에 대책을 마련하고자 동분서주하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